김태동, 권현빈

넨른전력 ; 자각몽



bgm ; 불꽃심장 - 파랑새




   태동아

 

 

 

   오랜만이다. 벌써 여름이네. 잘 지내? 네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인데 네 짜증이 들려오지 않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얼마 전에 동한이랑 세운이랑 바다에 다녀왔어. 너랑 같이 갔던 게 일 년 전인데 아직도 변한 게 없더라. 여전히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하기만 했어. 세운이가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불러줬는데 바다랑 되게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어. 동한이가 가만히 듣다가 나지막이 네 이름을 불렀어. 갑자기 네가 보고 싶더래. 나도 너 보고 싶다.

 

   동현이는 저번 주까진 숟가락도 제대로 못 들고 힘들어했는데 이제 좀 기운을 차린 모양이야. 오늘은 성우 형이 서울로 올라간다 해서 다 같이 이삿짐 옮기는 거 도와줬는데 동현이가 제일 열심이었어. 나중에 칭찬 좀 해줘. 요 몇 달간 내내 우울해하던 모습만 보다가 오랜만에 웃는 얼굴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더라. 성우 형의 그 몹쓸 개그를 당분간 못 볼 거라 생각하니까 조금 슬프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속이 좀 시원하기도 하고. 하하하.

 

   예현이는 아직까지도 나랑 네 이름을 헷갈려 해. 자꾸 나만 보면 권현빈보다 김태동이라는 이름이 먼저 떠오른대. 우리가 너무 많이 붙어 다녔어서 그런가 봐.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개명을 해버릴까 생각도 해봤는데 권태동은 너무 이상해서 관뒀어. 역시 사람은 주어진 이름대로 살아야 해. 아 이름하니까 그거 생각난다. 네가 옆 대학교 학생들한테 우리 학교 수교과에 현빈 있다고 소문 퍼뜨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배우 현빈인 줄 알고 찾아왔다가 권현빈인 거 알고 실망하고 돌아갔던 거. 아니, 그 사람들도 웃겨. 현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대학교를 다니겠냐고.

 

   환웅이랑 건희는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아직도 내 앞에서 네 이름을 꺼내는 걸 무서워하는 모양이더라. 난 괜찮은데. 둘 다 여행하는 동안 마음을 많이 추슬렀는지 한층 더 밝아진 모습이었어. 선물이라고 나한테 무려 카메라도 사줬는데 차마 이미 있는 제품이라고 말하진 못했어. 하긴, 나는 네가 인정한 마이너스의 손이니까 언제 하나 고장 낼지 모르는 일이니 여분의 카메라 하나쯤은 더 가지고 있는 게 좋을지도 몰라. 예전에 기억나? 같이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네 핸드폰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액정 깨 먹었었잖아. 진짜 너무 미안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너는 오히려 자기 핸드폰에 내 흔적이 남아서 좋다며 괜찮다고 해줬지. 난 네가 화낼 줄 알고 지레 겁먹고 있었는데 넌 가끔 의외인 부분에서 속이 넓을 때가 있다니까.

 

   난 요즘도 가끔 이상한 꿈을 꿔. 예전에 꾸던 그런 악몽들이랑은 다른 꿈이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실현되는 그런 꿈을 꾸는데, 예현이 말로는 그걸 자각몽이라고 한대. 예현이도 어릴 때 꾼 적이 있는데 걔는 하늘을 날고 지구를 부수는 꿈을 꿨다나 뭐라나. 그래서 내 핸드폰에 걔 이름을 파괴왕이라고 저장해뒀어.

 

   내 꿈은 온통 너에 대한 것뿐이야.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너와 함께 사고를 치고 다니기도 하고 땡땡이를 치기도 하고 같이 시험공부를 하기도 해. 꿈에서까지 공부를 한다니 조금 끔찍하긴 한데 그래도 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좋아. 또 가끔은 예전의 기억들이 꿈에서 재현되기도 해. 내가 한창 악몽에 시달려서 힘들어할 때 네가 날 달래주던, 그런 기억 같은 거. 네가 괜찮아. 나 여기 있어. 내가 너의 옆에 있으니까, 그것들이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야.”라고 해주는데 창피하지만 눈물이 좀 났어. 이제 다시는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그랬어. 네가 전에 그랬지. 결국 사랑은 언젠간 결핍될 수밖에 없다고. 그 말이 맞아. 정말, 결국 결핍될 수밖에 없더라.

 

   어젯밤에도 네 꿈을 꿨어. 네가 떠나가던 그날 밤이 내 꿈속에 찾아왔어. 집채만 한 트럭이 네 몸을 덮치고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던 네 모습이 두고두고 잊히지가 않아서, 코드를 뽑아도 자꾸만 리플레이가 되는 거야. 분명 꿈속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랬는데 그게 되지가 않는 거야. 그 뒤로 여러 번, 나는 꿈속에서 너를 따라가려는 시도도 많이 해봤어. 옥상에서 떨어져도 봤고 손목을 그은 적도 있었어. 그런데 다 실패해버렸어. 현실에서 하지 못할 거, 꿈에서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다 실패해버렸어. 옥상에서 떨어졌을 때는 중간에 커다란 나무에 몸이 한번 걸리는 바람에 충격이 완화되어서 살아남았고 손목을 그었을 때는 때마침 집을 찾아온 민현이 형에게 발견되어서 바로 구급차에 이송되어 목숨을 부지했어. 예현이가 잘못 알았나 봐. 자각몽이라면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아니면 내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일까. 난 아직까지도 살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는 걸까. 네가 없는 이곳에서.

 

   너의 장례식에서는 울지 못했어. 분명 기절할 때까지 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울음이 목구멍 끝에 턱, 하고 걸려서 나오지 않았어. 동현이는 애써 의연한 얼굴로 너를 떠나보냈지만 결국 화장실에서 몰래 엉엉 울었어. 난 그걸 보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 오히려 태연하게 동현이를 위로해줬던 것 같아. 신기하지. 네 생각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죽어도 날 울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꼭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려는 건가 싶었어. 네가 내 눈물을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울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더라.

 

   있잖아, 아까 내가 그랬잖아. 환웅이랑 건희가 내 앞에서 네 이름을 얘기해도 괜찮다고.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나 아직도 아파. 아파, 태동아. 너무 아파. 모두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들 너의 부재를 이겨내고 극복해냈는데, 나만 아직도 여기에 주저앉아 있는 것 같아. 그럼에도 일단은 살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내가 울지 못하는 게 너의 뜻이라면 내가 죽지 못하는 것 역시 너의 뜻이겠지. 나는 너에게 맡길게. 하지만 태동아, 나를 살려둘 거라면 이것만은 알아줘. 적어도 내게 너는 언제나 봄이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선명한 계절이었어. 넌 내 자존심이자 양심이고 죄책감이야. 너와 함께한 그 모든 시간이 내겐 축복이었고 난 모든 걸 후회해도 널 만난 것만큼은 후회하지 않아.

 

   그동안 고마웠어. 당분간은 널 잊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나 혼자서 걸어가 볼게. 정말 많이 좋아해. 우리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

 

   안녕.

 

 

 

   권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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