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가 짙습니다. 아마
가을이겠지요. 문지방을 넘은 지 오래되어 계절을 가늠할 수 없으나 단풍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떠난 지 한 해가 지났다는 뜻이겠군요. 아니, 어쩌면 두 해일지도 모릅니다. 삼년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삼년째에는 당신을 꼭 잊어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아니됩니다.
지난 여러 밤동안 꿈속에서 당신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내겐
고역이었습니다. 당신의 눈물을 닦아드리지 못하고 소맷자락만 움켜쥐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덧신만 내려다보았습니다. 몇날며칠이 지나도 덧신은 닳지 않았습니다. 눈물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열흘만 기다리면 돌아오겠다던 저와의 약속을 기억하시는지요. 믿지 않는다며 당신을 끌어안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애처럼 손가락 꼽아가며 날을 꼬박꼬박 세었습니다. 열번의 달이 지나가고, 스무번의 달이 지나가고, 백번의 달이 지나가고, 그 뒤로는 세는 것을 접었습니다. 그러고도 몇십번의 밤이 더 지나고서야 당신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적군의
수장에게 목이 베이고 몸은 바다에 버려졌다는 소식을요.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슬픈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습니다. 박동 소리가 어찌나 큰지 밥을 먹다가도 쿵쿵, 잠을 자다가도 쿵쿵, 숨만 쉬어도 쿵쿵거렸습니다. 한밤중에도 심심하면 들려오는 총소리보다도
더 크게, 쿵쿵. 혹여나 그것이 당신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일까봐,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서 버선발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저를 반기는 것은 당신이 심고 간 동백꽃 한 송이와 멈추지 않는 제 심장 소리뿐이었습니다. 다섯 번쯤
겪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동백꽃만 봐도 눈물이 났습니다. 우습게도, 그제서야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울음이 터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누구를 닮아 그리 어여쁜지 한없이 붉기만 한 동백꽃을 앞에 두고요.
그 뒤로는 한 시진이 일년이요, 일년이 십년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저는 붓을 놓았습니다. 글을 읽는 법도 쓰는 법도 음미하는 법도 모두 당신이 알려준 것인데, 제가
어찌 당신 없이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없는 시는 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제게 가르쳐주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이란
그토록 보잘것 없으면서도 때로는 당신의 육신이 뿌려진 바다처럼 광활해서, 제게 붓을 들 힘마저도 앗아가버렸습니다. 숨만 겨우 붙여놓고 모든 것을 갈취해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인줄 알았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언제나 불행은 예고가 없습니다.
당신을 알게 된 것을 후회합니다. 나의 황홀한 착각, 잃어버린 진실,
그럼에도 가장 달콤한 유혹. 내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간 나의 낭군. 제 잃어버린 시간들이 너무도 한스럽습니다. 시를 읊는 법도 쓰는
법도 잊어버린 채 당신의 이름 석 자만 보이는 곳곳마다 적어놓고 하루종일 목놓아 우는 제 모습도, 한스럽습니다. 이석민, 이석민, 이석민. 생전 살아계실 때는 한번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했던 그 이름, 떠나신
뒤에야 마음껏 불러봅니다.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한다는 말, 진심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돌아와주소서. 더이상은 견딜 수 없습니다. 삼년을 채워도 삼십년을 채워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당신의
잔향이 꽃향기를 에워싸서, 어디를 가도 당신의 향기만 제 뒤를 졸졸 쫓아옵니다. 해도 달도 지쳐서 숨어버린 어느 으슥한 가을밤, 제 방문을 두드리고
늦어서 미안하다 고백하셔도 좋습니다. 조금도 탓하지 않겠다 약속합니다.
내 삶에 찾아온 유일한 행복이여, 저를 다시 한번 구원해주소서.
동백꽃이 지고 있습니다. 물을
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제 눈물로는 역부족입니다. 어서
하루 빨리 달려와 저를 안아주소서. 당신의 꽃을, 살려주소서.
창밖으로 흰 눈발이 날렸다. 온 거리가 하얀 물결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멀고 아득한 설산에 홀로 고립된 조난자가 되어 눈을 느리게 꿈벅였다.
“민규야.”
침묵을 유지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원우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거 잘 알아. 근데 이거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
“민규야.”
선배가 재촉하듯 이름을 불렀다. 한참을 잘근잘근
공들여 씹다가 내뱉는 것이 아닌, 미끄럼 타듯 혀를 쭉 훑고 나온 글자 석 자였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의 뺨에 남은 푸르스름한 멍자국이 자꾸만 시야에 아른거려서였다. 생긴 지 꽤 됐음직한 그 자국은 못본 척할래야 할 수도 없이 새하얀 피부 위에 큼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잘 생각해봐. 그럼 난 갈게.”
차가운 거실 바닥에 선배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발끝을
질질 끌며 걷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덕분에 그의 구두 밑창은 멀쩡할 날 없이 늘 닳아 있었다. 꼭 내 마음처럼. 너덜너덜한 넝마 같았다.
“좋아해요.”
그의 발걸음이 뚝 그쳤다. 구태여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장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미친듯이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불안함의 징조라는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알아.”
이쯤되면 항상 드는 생각인데, 목소리 하나는 더럽게
좋은 사람이었다. 낮되 지루하지 않고 차분하되 차갑지 않았다. 딱히
그 부분에 반한 건 아닌데 가끔씩 사람 홀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알아.’ 예상한 대답이었다. 선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간 것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좆같은 새끼.”
그리고 버림받은 내가 혼자 우두커니 서서 욕을 읊조리는 것도,
모두 예상한 일이었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
w. 엔씨
어느덧 삼월까지 열흘도 남지 않았지만 겨울의 냉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오랜 꽃샘추위에 코끝이 붉게 물들었다.
“병신같네.”
나 자신한테 하는 소리였다. 주머니 속 칼날을
어루만지는 오른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이었다. 분명
그랬다. 오랜만의 실전 투입이기는 했지만 그게 긴장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하지 않은가. 추위가 아니라면 아침을 거른 탓에 힘이 부쳐서일 것이었다.
‘너라면 할 수 있잖아. 그렇지?’
떠올리기 싫은 누군가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씨발, 내가 무슨 자원봉사자인줄 아나. 무보수로 사람 죽여주게.”
허연 입김이 넘실넘실 피어올랐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부탁을 받아들인 걸 보면… 진짜 병신 맞다니까 김민규. 괜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튕기기는 존나게 튕겨놓고.
애초부터 이런 말도 안되는 집단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람 죽이고 그걸로 돈 벌어 먹는 그런 집단 말이다. 아니, 그 전에, 길 잃은 어린 양한테 적선 베풀듯이 내미는 그 선배의
손을 잡는 게 아니었다.
‘아가야. 갈 데가 없니? 형이랑 갈까?’
열여덟 살이나 처먹은 애를 아가라고 부르는 인간도 웃기지만 그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인 나도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부모 잃고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떠돌이에게 뭐 두려운 것이 있었겠냐만은. 그 뒤로 2년이 흘렀다. 이제
선배는 나를 아가라 부르지 않고 나도 선배를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겠다.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되었다.
손에 꼭 들어맞는 나이프를 가볍게 그러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선배를 들들 볶을 생각이었다. 이걸 빌미로 섹스를
청해도 좋고, 아니면 상처받은 척 연기해가며 그 콧대 높은 얼굴에 죄책감을 드리우는 것도 좋다. 어쨌거나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건 조직 내에서 공연한 사실이었고 선배가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었으니 그
죗값은 치러줘야 할 것 아닌가.
“Who killed Cock Robin?”
I, said the sparrow… 노래를 부르며 지나는 길목마다 붉은 꽃이 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밤, 선배가 내 몸에 새겼던 흔적들처럼. 나는 조용히 입술을 축이며 미소지었다.
표적의 거주지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낡은 거리, 정확하게는
빈민가였다. 주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천막들, 오래된
가로등에서 진동하는 쓰레기 냄새. 곳곳에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집중력을 흩뜨려 놓았다. 소리 죽여 내딛는 구둣발에 꽃잎이 짓이겨졌다.
“선배가 이런 곳에서 자랐단 말이지.”
상상이 안 갔다. 원우 선배는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온실 속 화초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의 말처럼 ‘못
배우고 자란 티’는 나지 않았다. 아둔하다기 보다는 교활하다, 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당장 그의 팔뚝을 차지하고
있는 문신만 해도 그에게 딱 어울리는 뱀이었으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온갖 추잡한 짓이란 짓은 다 벌이고 다니는 비열한 놈인데. 이번에는 내가 그 ‘추잡한 짓거리’에
사용되는 장기말인 거고 말이다. 지 좋다는 사람을 이용하는 그 선배가 이상한 건지,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당해주는 내가 더 이상한 건지. 혹은
둘 다거나.
선배가 그려준 약도를 따라가 보니 과연 그가 단언한대로 파란 대문의 허름한 주택이 나왔다. 그림이 무슨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모양새길래 이거 믿어도 되나 싶었는데.
‘후배님, 나 못 믿어?’
‘믿게 생겼어요?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단 낫겠다.’
시시콜콜했던 대화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문을
두드리자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구쇼?”
“택배 기사인데요.”
“그런 거 시킨 적 없는데.”
“전윤택 님 아니십니까? 발신인 전원우 님께서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신발을 신는 듯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뭔
택배냐며 궁시렁대는 목소리에서 원우 선배의 목소리가 났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또 시답잖은 생각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성의 얼굴이 문
틈새로 서서히 드러났다. 대문이 완전히 열리고 시야가 확보됨과 동시에 칼날을 거칠게 휘둘렀다. 목덜미에 정확히 꽂힌 칼이 검붉은 핏줄기를 내뿜었다. 다시 한번
예리한 칼날로 목을 두어 번 찔렀다.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액체가 손을 적셨다. 상당한 덩치의 몸뚱아리가 반항 몇번 못하고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
아래로 핏물이 조그마한 우물을 만들며 고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확인사살을 위해 복부를 찌른 뒤 나이프를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그래, 놀라울만큼 허무한 결말이기는 해. 조직에서도 매정하기로 소문난 그 원우 선배를 25년동안 학대했다는
사람치고는 생각보다 더 평범하고 나약했다. 아무리 선배가 지금은 실전에서 손을 떼고 조직 경영에만 관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일반인이라면 우습게 해치우고도 남았을 터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살살 구슬려가면서까지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해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고.
“아무리 자신을 학대해온 아버지라도 불효자가 되기는 싫다 이건가.”
코웃음이 나왔다.
“웃기지도 않아.”
하여간 남의 손을 빌려 자기 목표를 성취하는 데는 도가 텄다.
마뜩찮은 표정으로 혀를 쯧 찼다. 맛없는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남자의 육중한 몸을 어깨에 가볍게 들쳐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의 몸에서 싸구려 담배
냄새가 났다. 왜 선배가 그토록 담배를 싫어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실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도 그거였다. 선배를 화나게 하고 싶어서.
담배 말고도 선배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란 일은 모조리 다 해봤다. 가출도 해보고 마약도
해보고 자해도 해봤다. 가장 효과적인 건 의외로 자해였다.
아마 작년 겨울이었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직의
최전방에서 일하고 있었던 선배는 그날도 어김없이 임무 수행을 위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현장 투입에서 제외됐던 나는 하릴없이 컨테이너 박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선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화분이었다. 싹을 틔울듯 말듯 애태우고 있는 낡은 화분. 화분을 바닥에 집어던져 조각내는 것은 다섯 살짜리 꼬마애도 할 수 있다. 하물며
열아홉 건장한 청년이 못할 이유가 있으랴.
날카로운 절단면으로 손목을 짓이기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자해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그런 부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고통은 둘째치더라도 더러운 흙먼지와 이물질이 상처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은 꽤나 보기 괴로웠다. 그러다 핏줄을 잘못 건드린 모양인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고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팔 한쪽이 시뻘겋게 물들 때까지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캄캄하던
방안에 달빛이 드리울 때까지. 그리고 귀가한 선배가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선배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정신없이 깜박이고 손을 덜덜 떨면서 내 손목을 감싸쥐었다. 내내 아픈 줄도 몰랐던 상처가
기어코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몰려오는 통증에 잇새 사이로 앓는 소리를 내자 선배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민규야. 선배가 울었다. 아니, 운
건 아닌데… 울었다. 우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선배도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해는 관두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형언
불가한 욕망이나 집착 따위가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확립하게 된 사랑. 나는 그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것들을 내어주고 포기하고 희생했다. 그의 마리오네트가 되기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살인자가 되기를 거리낌없이 자청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배는 이런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선배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표적의 시체를 차 트렁크에 싣고 한참을 달렸다. 내비게이션은
켜지 않았다. 목적지는 나도 모르고 내비게이션도 몰랐다. 그냥
멍하니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무엇에 분풀이라도 하듯이 핸들을 거칠게 꺾고 엑셀을 밟았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는 지 모르겠다. 기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굴렀던 차가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바닷가 근처의 어느 절벽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퍽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아쉽게도 감상에 젖을 기분이 아니었다.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물고 트렁크를 열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시체 냄새가 트렁크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맞물려 코를 찔렀다.
“아 배고파.”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이딴 태평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걸 본다면 선배가 뭐라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키득키득,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로지르며 흐리게 피어올랐다.
“절경이네.”
바다 말고, 담배 연기가.
죽은 남자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의 셔츠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시체가 질질 끌릴 때마다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터덜터덜
불규칙적인 발걸음이 귓가를 쓸었다. 절벽 저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흰 물결이 바람에 실려 잠자코 요동쳤다. 바다 냄새는 오랜만이었다. 아닌가, 처음인가.
“알게 뭐람.”
일순간 파도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던 뱀이 덫에 걸려든 사냥감을 한 입에 꿀꺽한 것처럼. 끔찍한,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적막이었다. 시체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스르르 놓아버렸다. 그가 절벽 아래로 철푸덕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함을 뚫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도중에 나뭇가지에 몇번 걸리기라도 했는지 나무가 우지끈 부러져버렸다.
임무 수행 완료. 나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었다. 돌아가면 선배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내가
당신의 지시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왔다고 자랑하면, 기뻐할까? 슬퍼할까? 나를 원망할까?
무너져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나락 끝 그 너머를 맛본 사람처럼. 온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지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소원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었다. 알 수 없는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미련한 발걸음을 돌렸다. 반대쪽
하늘에서는 이미 초연한 초승달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고했어.”
그리고 그곳엔 선배가 서 있었다.
“이렇게 빨리 끝내줄 줄은 몰랐는데.”
심장이 덜컥, 하고 가라앉았다.
이 바닥에서 나름 베테랑인 선배는 기척을 숨기는 데 능했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체를 처음 끌고 왔을 때부터. 아니, 내가 그를 죽였을 때부터.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 다. 김 빠지는 웃음이 났다. 또 놀아났구만. 이 양반의 손바닥 안에서.
“그럼,”
선배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없이 그의 눈가를 응시했다.
“착한 어린이에겐 상을 줘야지.”
그의 한 손이 뒷목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이 턱을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친 건 순식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온몸이 굳어버린 틈을 타
그의 혀가 무방비한 입술을 비집고 침입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뒷목에 닿은 선배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런 걸 바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키스하게 되자 겁이 날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갑작스럽고 불안했다. 생각만큼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몸 어딘가가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혀와 혀가 얽히고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숨을
잠깐 고르는 듯 하던 선배는 내가 눈을 희미하게 뜨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입을 맞춰왔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울려퍼졌다.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거세게 난동을 일으켰다. 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선배와 나, 그리고 파도. 그게 이 진득한 밤 풍경의 전부였다. 오랜 입맞춤이 끝을 맺은 건 바다가 다시 한번 잠잠해지고 밤이 한층 더 깊어졌을 때였다. 나는 바다를 등지고 조용히 눈을 깜박거렸다. 선배의 안경알에 달빛이
비쳤다. 어색하지만 불편하지만은 않은 침묵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규야.”
낯선 목소리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고마워.”
그리고 선배의 손길이 나를 뒤로 떠밀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상황 파악할 시간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뭇잎이 스산히 흔들리는 소리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낙하하는
소리가, 파도가 흙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마저 나는 선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담담한 시선을 느끼며 왠지 그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는 줄도 모른다.
선배와 입을 맞춘 그 순간부터? 아니, 선배와
손을 처음 맞잡은 그 순간부터.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젊은 화가였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에게서는 드물게 크레파스 냄새가 났다. 그의 이니셜이 새겨진 붓은 낡지만
유연했고 팔레트는 더없이 깨끗했다. 강의실 창가 자리에서 그를 내다보면 하얀 캔버스가 조화로운 빛깔로
천천히 물드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오전 열한 시부터 하늘이 새까매질 때까지 그는 붓을 내려놓는
법이 없었다. 회화 대상은 근처 건물일 때도 있었고 지나는 자동차일 때도 있었다. 뭐가 됐든 사람은 절대 그리지 않았다. 실력은 좋은데 손님이 얼마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화가는 말수가 적었다. 내가 열 마디를 하면 그는
한 마디를 했다. 그래도 묻는 말에 곧잘 대답하는 걸로 봐서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하루종일 옆에서 꽥꽥대는 불청객이었지만 그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플라스틱 의자를 내 몫까지 두 개 챙겨오기 시작했다. 나는 수업이 마치면
거리로 나가 그의 옆에 놓인 빈 의자에 앉는 것이 습관이 됐다.
화가의 이름은 김민규였다. 이로써 내 주변에는
김민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셋이나 됐다. 하나는 이모부였고 다른 하나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화가 김민규는 내가 아는 김민규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평생을 바쳐도 맞출 수 없는 퍼즐 같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퍼즐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은 치밀하고 완전했지만 그 속에 숨겨진 내면은 위태롭고 불명했다. 그의 눈빛에 드리운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나는 더 큰 희열을 느꼈다. 단순한
애정이나 호감 따위로 치부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정해진 규칙 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원주율을 닮은 관계라고 믿었다.
Always with
me
w.엔씨
내가 그의 부재를 알아챈 건 언제나처럼 강의실 빈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을 때였다. 창가의 반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로 이젤을 세우고 있어야 할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눈이나 비도 내리지 않았다. 혹시 어디 아픈 걸까 싶어 걱정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내가 관심도 없는 교양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이유는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기
위해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앞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후배들을 한번, 미리 꺼내놓은 필기 노트를 두번 힐끔거렸다. 교수님은 심각한 얼굴로 피피티에 뜬 오류를 해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리저리
눈치만 보다가 결국 노트를 덮어 가방에 황급히 쑤셔넣은 뒤 후배들을 방패막 삼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느티나무 아래까지 달음박질한 것이 무색하게도 화가는 강의실에서 본대로 그곳에 없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플라스틱 의자도, 청록색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신문지도, 그의 이름이 정갈하게 적힌 스케치북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면 쉽게 번지는 물감 대신 크레파스를 들고서라도 나타나던 그인데.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요즘 날이 많이 추워졌으니 감기일지도 몰랐다. 돈이 없어서 대학을 포기하고 화가 일을 하고 있다고 했으니 여행은 아닐 거다.
만약 늦잠이라면 귀여우니까 용서해줄 수 있는데. 머리카락을 사납게 헝클였다. 타인의 일에 마음을 졸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가가 늦게라도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시간이고 벤치에 앉아 있어 봤지만 그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석양으로 차츰 물들었다. 바닥에
깔린 낙엽 무더기가 춤을 추고 스산한 바람이 노래했다. 가게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세상이 다홍빛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잠들었다. 나
혼자만 세상에서 동떨어져 바다 위에 난파된 기분이었다. 시간이 끝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바닷물이 빠지고 마침내 진득한 어둠이 밤하늘을 뒤덮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에 빠진 생쥐마냥 무겁게 떼는 걸음마다 미련이 한 움큼씩 남았다.
다음 날은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목도리를 꽁꽁
싸매도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느티나무의 가지들이 강풍에 맥없이 흔들렸다. 나는 따뜻한 난방이 켜져 있는 강의실을 마다하고 오늘도 학과 건물을 뛰쳐 나왔다.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고 다닐 작정이었다. 화가는
나름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보다는 얼굴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어쨌든 학교 앞 잘생긴 화가, 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교수님도, 수학 동아리 선배도,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과 동기도. 하지만 현재 그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가의 행방은 의외의 인물에게서 알아낼 수 있었다. 맞은편의
작은 꽃집 아주머니였다. 화가는 그녀에게 곧잘 말을 붙이며 꽃을 한두 송이씩 사가고는 했다. 스치듯이 들은 말로는, 그녀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요 앞에서 그림 그리는
총각? 알지.”
“혹시 지금 어디 있는 지도
아세요?”
“글쎄… 병원에 있지 않을까? 어디 아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아니고. 나도 나이를 먹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아주머니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장미꽃의 가시를 쳐냈다.
오랫동안 느티나무 주위를 서성거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역시 아픈 모양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입원해 있는 거라면 단순 감기는 아닐 테고. 죽을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근처에 병원이라면 서너 군데밖에 없었다. 사실은
더 있었지만 그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비싼 병원은 우선 배제시켰다. 오래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도보로 삼십 분 이상 걸리는 곳을 찾아갈 것 같지는 않아 역시 목록에서 제외했다. 거르고 걸러내다 보니 남는 곳은 딱 세 군데였다. 더이상은 좁혀지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자체 휴강도 했겠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바람에 자꾸만 새어나오는 콧물을 닦으며 무작정
추위에 떨고 있는 다리를 움직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하나하나 다 뒤져보는 수밖에.
I
화가는 두번째로 찾아간 병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프론트에
김민규라는 환자가 여기 입원해 있나요, 라는 질문을 하면서도 설마 했던 예감이 맞아 떨어지자 만감이
교차했다. 왠지 모르게 입맛이 썼다. 아까 꽃집에서 산 꽃
덕분에 병문안을 온 친구로 보였는지 간호사는 친절히 그의 병실까지 안내해줬다. 뭐, 병문안을 온 친구. 틀린 건 아니니까. 입원 사유는 간호사에게 묻지 못했다. 알려주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본인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기도 해서였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빨갛게 얼었던 손은 녹아내린지 오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고 혼란스러웠다. 얼굴을 보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괜찮냐고? 왜 말 안 했냐고? 많이
아프냐고? 한 번 싹을 튼 망설임은 거침없이 시간을 잡아먹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금방이라도 뇌가 터질 것 같았다. 꾸물거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약해져만 갔다. 다음 번에 다시 올까 싶다가도 역시 오늘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보고 싶기도 했고.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홱 꺾었다. 301호 6인실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점심 시간인지 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한
자리만 빼고.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갈색 뒤통수가 낯이 익었다. 화가의
자리는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였다.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는 동안 그는 내 발소리를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침대 옆에 놓인 보조 의자에 앉아 비어 있는 화병에
들고 온 꽃을 꽂았다. 화가의 옆모습을 덤덤히 바라보다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화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 스케치북이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를 본 그의 눈이 일순간 크게 떠졌다.
“오랜만.”
…이에요. 말을 잇고 싶었는데 우습게도 목이 메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어제 하루 안 봤을 뿐이니 딱히 오랜만도 아니었다. 화가는 눈을 끔뻑끔뻑거리다가 나의 어깨를 콕 찔러 봤다.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확인해 보려는 눈치였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내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그의 손은 추운 바깥에 있다 온 나보다도 더 서늘하고 창백했다.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안 불렀어요.”
“…전화번호 모르잖아요.”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을 못 하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스케치북에 몰래 연락처라도 적어놓을 걸 그랬다. 내가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알아요. 불평 섞인 목소리를 내자 화가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그의 앙상한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많이 아파요?”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나을 수 있어요?”
그는 침묵을 지켰다. 나도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끊었던 담배 생각이 났다. 아픈 건 그인데, 울고 싶은 건 나였다.
II
그 후로 두 번 다시 느티나무 아래에서 화가를 볼 수 없었다. 거리에서 병원으로 장소가 바뀐 것 뿐이었다. 갈색 앞치마 대신 하얀
병원복을 입고 붓 대신 연필을 들었다.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렸다. 창밖의
나무, 텅 빈 병원 침대, 서랍 위 꽃병,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수많은 건물과 자동차.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도 여전했다. 수업이 마치면 한달음에 뛰어와 그의 병실 문을 두드렸다. 가끔은
옆 침대의 환자가 약 먹기를 거부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또 가끔은 폐암을 앓고 있는 꼬마애의 친구들
덕분에 병실에 발 디딜 틈 하나 없을 정도로 북적거릴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화가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 어디에도 섞이지 않는 물감처럼 혼자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외로워 보였지만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애초부터 말수가 적었던 화가는 예전보다도 더 과묵해졌다. 한
번 나빠진 혈색은 돌아오지 않았고 두 볼은 굶주린 사람처럼 폭 패여 들어갔다. 밥을 먹으면 금방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고 불면증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 날도 많았다. 배수구에 머리카락이 한가득 엉키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는 숟가락 하나 드는 것조차도 힘겨워하면서 연필만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창틈 새로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추워하는 그를 안아주면서 나는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하지만
나도, 화가도, 의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화가가 입원하고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나는 그의 것과 비슷한 스케치북을 한 권 구했다. 친구들은 생전 숫자와 공식에만 파묻혀 살던 놈이 웬일로 스케치북을 샀냐며 놀라워 했지만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그날부터 매일매일,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나도 옆에서 열심히 연필을 끼적거렸다. 4B 연필보다는 계산기와 컴퍼스에 더 익숙한 손인지라 선은
늘 지저분했고 얼굴 비율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림을 빌미삼아 화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어버렸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창밖으로 며칠째 폭우가 퍼부었지만 병실 내에는 나른한 온기가 퍼졌다.
어느 새부턴가 화가의 엄지와 검지에 크레파스가 묻어나는 날이 많아졌다. 병원에 들어온 뒤로 무채색이기만 하던 그의 그림에 색동옷이 입혀졌다. 그는
검은 자동차를 보고도 샛노란 자동차를 그렸다. 잿빛 하늘을 보고도 새파란 하늘을 그렸다. 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훨씬 더 아름다웠다. 나는 그가 창조해낸 스케치북 속의 세계마저 남몰래 사랑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스케치북은 그의 웃는 얼굴로 나날이 채워져갔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세계에는 오로지 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민 씨는 왜 나만
그려요?”
어느 날 화가가 문득 물었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대어 나의 스케치북을 구경하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무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사랑해서요.”
그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사랑은 그저 미친 짓이에요.”
나도 그를 따라 조용히 웃었다. 화가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화가가 스케치북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중대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우리 한 번 미쳐보자고요.”
III
병실 안에서 낯익은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반쯤 갈라져 있었고 꽉 다문 잇새 사이로 간간히 울음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호사는 최대한 빨리 와달라는 말도, 환자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김민규 환자가 위독합니다.
그 한 줄이 내가 받은 문자의 전부였다. 단 한 문장이 나를 혼수 상태로 밀어넣었다. 나는 화가가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발버둥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병실 문 앞에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말없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의사들이
응급 침대에 화가를 싣고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고 나는 멀어지는 그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랑은 미친 짓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한 번 미쳐보자고요.’
아니요. 취소할게요. 함께 미쳐보자는 말, 거짓말이었어요. 사랑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을게요.
다시는…
‘좋아요.’
다시는 사랑받지 않을게요.
수술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병실 안은 한바탕
해일이 일기라도 했던 것처럼 소란의 잔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불은 혈흔이 묻어 지저분했고 깨진
화병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을 찾았다.
토기가 치밀었다.
어둠이 무르익는 새벽 두 시. 화가는 울고 나는
잃어버린 달을 쫓는다.
IV
찰나였지만 그 찰나가 존재했었다는 기억만으로
어떤 사람들의 관계는 지탱될 때가 있다.
용윤선, 울기
좋은 방
V
그가 남긴 유품은 낡은 스케치북과 닳고 닳은 크레파스, 그리고
먼지 쌓인 붓통 하나가 다였다.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다는 의사의 말에 장례식도 치르지 못 했다. 나는 그의 화구가 담긴 종이 가방을 한 손에, 그의 스케치북을 다른
한 손에 들고 한참동안 허전한 침대를 넋놓고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병실을 쓰던 꼬맹이 하나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한동안 잠잠하던 빗소리가 또다시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갇힌 채 새하얀 침대 매트리스에 조용히 걸터앉아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스케치북을 열었다.
맨 첫 장의 카페 풍경을 그리는 날에는 오늘처럼 비가 내려서 물감 대신 크레파스를 썼다. 그리다가 검은색 크레파스가 부러지는 바람에 급하게 내 색연필을 빌리기도 했다.
덕분에 맨 오른쪽에 위치한 의자는 다른 의자들에 비해 유난히 선이 얇았다. 한 장, 한 장씩 천천히 들여다보며 그림을 뒤로 넘겼다. 카페 풍경,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거리, 낙옆으로 뒤덮인 자동차. 언젠가 화가의 어깨 너머로 몰래 훔쳐 보았던 그 그림들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한다. 그날의 날씨는 어땠는지, 그날의
화가는 어땠는지, 그날의 우리는 어땠는지. 모두 기억한다.
스케치북을 반 정도 넘겼을 때 음습하고 투박한 색채의 소묘화마저 점점 사그라들고 크레파스
그림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화가의 몸에서 나던 크레파스 냄새가 기억 저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그림의 귀퉁이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그의 사인을 눈으로 훑었다. 종이를 계속해서 뒤로 넘겼다. 우리가 함께 보낸 수많은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규칙적으로 스케치북을 넘기던 손이 어느 한 부분에 도달했을 때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언제나 무생물만을 고집하던 그였다. 사람은 그리고 싶지 않다며 끝까지
고개를 내젓던 그였다. 나는 종이 한 장을 꽉 채운 누군가의 얼굴을 멍하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울퉁불퉁한 종이의 표면이 손가락을 간질거렸다.
나였다. 그건 나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같은 얼굴이었다. 그 다음을 넘겼다. 또 같은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 자는 얼굴, 피곤한
얼굴, 그림에 열중해 있는 얼굴… 모두 나였다. 심장이 아프게 뛰고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스케치북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마지막 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언제나 빼먹지 않고 그리던 수줍은 사인도 없었다. 그 대신 죽기 직전 온 힘을 다해 휘갈긴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그가 지나가듯이
중얼거렸던 말이 생각났다. 사는 건 너무 아프다고.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을 때 그가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조용히
눈물을 토해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씨를 보자 기어코 몸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사는 건 너무 아팠다.
거리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사람들의 발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모두. 누가 억지로 귀마개라도 씌운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뭉그러지는 감각과 옅은 햇빛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심결에
걸음을 멈춰세웠다. 너였다. 분명 너와 시선이 스쳤다. 심장이 거세게 내려앉았다. 하마타면 너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달려가서 너의 어깨를 돌려세우고 힘껏 끌어안을 뻔 했다. 네가 나를
잊어버렸다는 것도 깜빡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너는 이미 사람들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나는 근처의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옷가게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면 네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이었고 또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 추운 날에 또 얇은 가디건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던 네가 자꾸 시야에 아른거려서.
이 바보야
w. 엔씨
소주를 두 병째 비웠을 즈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있는 테이블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원우 형이 술잔을 뺏어들었다. 어딘가 화나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긴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다시는 이런 일로
전화하지 않겠다며.”
나는 엄마한테 혼나는 어린 아이처럼 머리를 푹 숙였다. 술 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다. 원우 형은 말없이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다가 팔짱을 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민규가 널 알아보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럼 됐잖아. 이제 너도 잊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은 그런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결국
형은 나를 말리기를 포기하고 소주를 한 병 더 추가했다. 차라리 오늘 다 토해내고 잊어버리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나까지 잊으면 어떡해. 너도 잊었는데
나까지 잊으면 지난 5년은 누가 기억해줘. 속이 울렁거렸다. 5년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버겁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걸. 친구든 연인이든 뭐든.
***
너의 병명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른 건 다 기억해도 그것만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들의 대부분은 병원에서 이루어졌고 너는 늘 하얀 병원복 위에 갈색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환자가
춥게 입고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줘도 당최 말을 듣지를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너처럼
제멋대로인 애는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였다. 제멋대로인 건 의상뿐만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군것질에 손을 대고 수면 시간도 불규칙적인 너는 말 그대로 꼴통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비타민 드링크제나 과일 따위를 사들고 너의
병실을 내 집마냥 드나들었다. 내가 갖다준 만화책을 읽고 있는 너는 병을 앓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늘 생기가 돌았다. 간호사 누나에게서 네가 굉장히 심각한 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네가 가벼운 골절상을 당한 줄로만 알았을 거다. 너는 우리 반 남자애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고
심지어 키는 반 평균보다도 10센티나 더 높았다. 너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귤을 까먹을 때에도 나는 네가 환자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고는 했다.
하루는 학원이 늦게 끝나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병원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병원은 평소답지 않게 어수선했고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여기가 병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했다. 복도가
그날따라 유난히 어둡고 음습하게 느껴졌다. 비명 소리가 다름아닌 너의 병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란 걸 깨닫기
전까진. 언제나 닫혀있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문밖까지 뻗은 너의 그림자가 거칠게 발작을 일으켰다. 의사 선생님이 알아듣지 못할 전문 용어를 나열하는 소리가 들렸고 몇번의 기계음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미친듯이 날뛰던 너의 그림자도 종적을 감췄다.
병의 증세가 악화된 것이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고 성공 가능성은 높지만 부작용으로 기억 상실이 뒤따를 위험이 크다고
했다. 나는 네게 당연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너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기나긴 침묵 끝에 네가 씹듯이 내뱉은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너를 잊어버리면
어떡해.”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날 것도 같았고 웃음이 날 것도 같았다. 나는 너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괜찮다고, 내 걱정은 하지 말라고. “그럴 리가 없어.”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거짓말이란 걸 들킬테니까. 그 대신 나는 너의 목에 조용히 얼굴을
파묻고 너의 등을 토닥였다. 내 나름의 위로였다. 네가 아니라, 나를 다독이는 위로.
그 뒤로 한동안 너를 만나지 못했다. 병원에 문의를 넣어봐도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하니 병문안을 허가할 수 없다는 답장만이 돌아왔다. 더군다나 수능과도 시기가 겹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너의 생각을 잠시 넣어둬야 했다. 내가 가진 현실은 턱없이 초라했고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대학에
합격하고 해가 바뀌고 우리가 성인이 되고 봄이 한발짝 앞으로 다가오고. 그렇게 시간이 정신없이 흐르는
동안 나는 너의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마침내 방문을 허락받은 것은 어느새 시간이 2월의 끝자락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네게서 예전의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은 심하게 야위어 얼핏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너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입술 주변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는 대신 마주 웃어주었다. 몸안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내일이 마지막
수술이래.”
아마 이제 겨우 시작이겠지. 너는 그렇게 덧붙이며 처연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얼굴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애꿎은 이불 시트만 노려봤다. 초침
소리가 수명을 갉아먹었다. 창문 밖을 응시하던 너의 이불 위로 굵은 눈물이 빗줄기 내려오듯이 투둑 떨어졌다. 그제서야 황급히 고개를 올려 너와 시선을 맞댔다. 너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입술만 바르르 떨고 있었다. 뼈가 불거진 너의 손을 붙잡으며 숨죽여 눈물을
쏟아냈다. 최대한 숨기고 싶었는데 네 앞에서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몸은 성인이 되었는데 마음은 아직도 어리고 불안했다. 너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가 어떻게 되든
아무렇지 않게 살아줘.”
“…”
“어떻게든. 꼭.”
그게 너의 마지막 말이었다.
***
“야 김민규! 옷 좀 따뜻하게 입으라고 했지!”
“쪄죽겠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따뜻하게 입어!”
익숙한 이름과 목소리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너의 목소리를 인식하기도 전에 눈시울이 먼저 반응했다. 붉게 달아오르는
눈을 감추려 입술을 꾹 물고 눈물을 삼켰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누군가가 누른 시각 장애인을 위한
안내음이 거리에 울려퍼졌다. 너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예전
그대로였다. 눈, 코, 입, 봄을 닮은 향기. 고개를 너의 반대쪽으로 돌렸다.
M은 아른거리는
촛불 아래 환하게 빛나는 S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S는 세상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 M은 들고 있던 양초를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촛농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 스스로 오른손의 신경을
끊어버린 뒤로 M은 두 번 다시 아픔을 느낄 수 없었음은 물론, 그토록
사랑하던 바이올린도 켤 수 없었다. M은 S의 침대 옆자리에
소리 없이 걸터앉으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았을텐데.
이기적인 내면의
목소리가 혀끝에서 똬리를 틀었다. 커튼 밖은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간은 많았다. M은 생각보다 침착한 제 자신에 놀라며 S의 소매 단추를 끌렀다. 그의 굵은 손목이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M은 S의 손목뼈를 가로지르는 길다란 흉터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이 옅은 흉터 하나가 모든 일의 원흉이자 시발점이었다. M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옛 일에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했다. 그날의 부모님은 평소보다 배는 초조하고 부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시간을 확인했고 어머니는 좀처럼 자리에 앉지를 못 하고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아직
어렸던 M은 느닷없이 숨바꼭질을 하자던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안방의 구석 자리를 차지한 작은
옷장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비좁은 문틈 새로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아버지가 해탈한 표정으로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모습도, 갑자기 들이닥친 이름 모를 괴한이 부모님의 목숨을 손쉽게 앗아가는 모습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방바닥에 고꾸라진 부모님의 몸이 싸늘한 고깃덩이로 식어가고 나서야 M은
부들거리는 두 다리를 이끌고 옷장 밖으로 기어나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머리가 쉴새없이 지끈거렸다. 부모님의 시체 아래 고인 핏물은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검붉고 끈적였다. 하루 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남겨진 물건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책장
사이에 꽂혀있던 비상용 통장과, 살인범이 흘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너덜너덜한 지갑 하나. M은 그 지갑에 들어있던 사진 속 남자아이의 얼굴과 그의 손목에 난 흉터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대학에서 처음 만난 S는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또 그만큼 쾌활한 학생이었다. 보기만 해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을 지을
줄 알았으며 장난은 치되 선은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두들 S를
좋아했고 M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저 동경이나 우정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에게 S는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유일한
세계이자 탈출구였다.
M은 몇 년 전의
자살 시도로 인해 더이상 바이올린은 켤 수 없게 되었지만 음악을 완전히 놓지는 못 했다. 그는 작곡의
길로 접어들었고 S는 같은 학교에서 보컬을 전공하고 있었다. 비록
서로 추구하는 음악의 색깔은 달랐지만 둘은 종종 협업을 하기도 했고 서로의 작업물에 세세한 감상평을 남겨주기도 했다. S는 몰랐겠지만, M이 쓴 곡들은 사실 모두 그를 생각하며 쓴 것들이었다. M에게는 S가 그의 아폴론이었다.
그는 S를 위해 제 모든 청춘과 음악을 쏟아부었다.
M은 S를 비롯한 네 명의 친구들과 항상 어울려 다녔지만 그들 모두와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S를 제외한 나머지 셋 중 하나인 A는 매번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는 M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B 는
말수가 적고 음침한 인상의 M을 곱게 보지 않았다. C는
M을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M은 늘 그들과 함께 다니면서도 S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당구장에서 다같이 짜장면을 먹을 때에도 저 혼자 구석에 앉아 악보지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고, 피씨방에서도 남들이 스타크래프트를 할 동안 혼자 음악 프로그램을 가지고 노는데 여념이 없었다. M은 그들이 자신을 마뜩찮게 여긴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해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쓸모 없는 것이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S는 언제나 친구
이상의 존재였고 그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S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여자 관계가 복잡했고 툭하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일쑤였다. 싫은 것을 싫다고 딱 잘라 말하지 못 하는 유한 성격도 그에 한몫했다. S는 자신의 그런 점이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은 없을 거라 판단을 내린 건지 도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우유부단함 때문에 끝맺음을 확실히 하지 않아 –고의는 아니었지만– 한번에 여섯 명의 여자를 사귀게 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뒤처리는 항상 M과 친구들의 몫이었다. M은 S를 대신해 여자들에게 해명을 하러 다닐 때마다 애꿎은 오해와
눈초리도 받고 가끔 심할 때는 이유 없이 얻어맞기도 했다. 그래도 M은
웃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S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S는 저 때문에 덩달아 욕을 먹는 친구들에게 미안했는지 한동안 학교에도 안 나오는
듯 했으나 며칠만 지나면 다시 원상복귀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S의
전 여자 친구 중 하나가 그와 헤어진 뒤 홧김에 근거 없는 루머를 학교 게시판에 퍼뜨린 것이었다. S가
그의 전공 교수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둥, 수준 이하의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인맥으로
부정 입학을 했다는 둥, S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거짓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만큼 터무니없는
글이었다. 게시글은 금방 삭제되었지만 이미 조회수가 500을
넘긴지 오래였고 삽시간에 다른 포털 사이트에도 복사되어 원문 그대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M도 그 조회수 500 에 끼어 있었다. S의 실명이 거론되어 있을 뿐더러 그의 사진까지
떡하니 올라와 있는 그 게시글을 보고도 M은 설마 이걸 믿는 사람들이 있겠어, 하고 안일하게 넘어가고 말았다. 크나큰 오산이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그 수위와 부피를 키워나갔다. S 장본인이
그 소문을 직접 접했을 때 즈음에는 그의 이미지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있었다. 그는 결국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 만에 대학을 중퇴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M도
학교로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S는
그렇게 된통 데인 뒤에도 여전히 여자 친구를 뒤에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M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
하면서도 끝내 그의 곁을 떠나지 못 했다.
“좋아해.”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한 날 M이 S에게 고백했을 때에도 S에게는
이미 두 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S가 그를 받아준
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 곁에 있어만 줘.”
단순한 동정심, 혹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에선지 S는
그 날 이후로 모든 여자들과의 연락을 끊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틈만 나면 여자를 만났던 이유는
M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물론 M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손톱만큼을 나눠주면서 그게
자신의 전부인 양 얘기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S는 일방통행이라도 괜찮다는 M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이 M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상습적으로 악몽을 꾸는 그를
힘껏 껴안아 달래주고 그의 얼굴에 정성스레 입을 맞춰주었다. 그렇게 의심이 많은 M도 가끔은 S가 자신을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M은 S의 가족
사진에서 15년 전 그 괴한의 얼굴을 발견하고도 그를 쉽사리 놓지 못 했다. 그의 손목에 난 오래된 흉터를 보고도, 그의 아버지와 똑닮은 눈매를
보고도 못 본 척 시선을 회피했다. 설령 S가 그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S는 S일 뿐이라고,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M은 흔들리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S에게 다가갔다. 신경이 파열된 오른손
위로 멀쩡한 왼손을 겹쳐쥐고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눈물이 눈꼬리를 비집고 흘러나와 S의 베개를 적셨다. 네가 그 사람의 아들인 줄 알았더라면 널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민규야.’
‘…’
‘그래도 널 사랑해.’
그렇게 다정하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M은 팔에 무게를 실어 잠든 S의 목을 억세게
졸랐다. 한밤중의 습격에 S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위에 올라탄 M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쳤다. 침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M은 그의 목을
놓아주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시야를 차단해서 다행이었다. S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됐으니까.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S의 시선이 M에게로 닿았다. 덜컹거리던
침대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고요한 적막만이 그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S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M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S의 두 눈이 조용히 닫히는
것을 보면서 M은 핏기가 가신
입술을 달싹거렸다.
“미안해.”
“…”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 거, 거짓말이었어.”
“…”
M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머릿속에 가득찬 낱말들을 힘겹게 뱉어냈다.
“날 좋아해줘.”
M은 자신의 뻔뻔함에
역겨워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입 밖으로 토해낸 진심은 얽히고 설킨 거미줄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한데 뒤얽힌 거미줄은 오히려 제 주인을 옭아매어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
“…그리고 용서해줘.”
S는 더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M은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음악도 사랑도 모두 죽고 없는 것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회한다 해도, 이제는 너무 늦었다.
M은 S의 목에서 손을 떼고 전날 밤 침대 밑에 미리 놓아두었던 기름통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미련과 원망과 함께 쏟아부었다. 침대 시트가 천천히
젖어들어갔다. M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탁자 위의 촛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흥건히 젖은 침대 위로 순식간에 불이 붙어 M을 잡아먹을 듯이 높게
치솟았다. M은 선홍빛으로 타오르는 불길의 중심에서 S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오른손에 먼저 불길이 번졌다. 살갗이 타는 냄새가 방안을 빈틈없이 메웠다. M은 뼛속까지 녹아드는
불길 속에서 S가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환상을 보았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도 같았다. M은 S의 시체를 감싸안고 붉은 화염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부모 없이 혼자
자라야 했던 외로움을 S에게 똑같이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듯 비몽사몽한 녀석의 목소리에
숨죽여 키득거렸다. 이석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곧게 뻗은 속눈썹이 숨쉴 때마다 미약하게 오르내렸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도 똑같이 엎드려 눈을 감았다. 봄날의 햇살과 안온한 공기 속에서 서서히 잠에
잠식되어 갔다.
나도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너에게 난, 나에게 넌
w. 엔씨
이석민의 이름은 교내에서 나름 유명한 편이었다. 각종 경연대회를 휩쓸고 다닌데다가 축제 기간만 되면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학생이라서 중학교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들었다. 거기에 성격 좋은 마당발이라는 점까지 한몫해서 이석민 하면 모르는 애가 없었다. 아마 어제 전학왔다던 옆 반의 서명호도 이석민을 알 거다.
호탕한 웃음은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말은 많지만 남에게 상처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능동적이지만 책임지지 못할 일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이석민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석민과 작곡을 취미로 삼는
내가 친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석민은 나의 음악과 교감했고 나는 이석민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내가 기타줄을 튕기며 악보지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을 때면 이석민은 어느새 다가와 그 위에
목소리를 입혀 주었다. 가끔은 나의 견해와 완전히 딱 맞아 떨어질 때도 있었고 또 가끔은 나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노래를 해석할 때도 있었다. 뭐가 됐든 결과는 항상 만족스러웠고 쉬는 시간만 되면 교실
안은 늘 우리의 음악이 숨을 쉬었다. 이석민의 노래도, 나의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도, 나의 어깨를 감싸쥔 이석민의 길다란 손가락도 모두 아름다운 선율의 일부분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다행히 나는 사리분별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파도인 척 밀려온 해일에 오래 허우적거리지는 않았다.
이석민을 지켜보는 것은 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점심 시간이면 창가에 앉아 축구하는 녀석을 훔쳐 보는 것은 자연스레 일상이 되었다. 아직 봄이라고는 하지만 햇볕이 제법 따가울 법한데도 이석민은 지치지도 않고 잘만 뛰어다녔다. 이기면 웃고 져도 웃었다. 승패에 상관없이 축구를 한다는 그 자체를
즐겼다. 축구공 하나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그 모습조차 나에게는 하나의 음악이자 봄의 초상이었다.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녀석은 흙먼지도 털어내지 못한 채로 허겁지겁 교실로 올라왔다. 덕분에 점심 바로 다음 시간에는 교실에서 땀냄새가 진동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학을 천마리 접으면 짝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백마리째 접고 있길래 마저 접었다. 시작을 한 이상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잘못된 방식으로 접었길래 결국 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접었다. 어쩐지 꼬리 부분이 뭉툭하게
나온다 싶었다. 인터넷에서 보는 방법으로는 이해가 도무지 안 돼서 엄마한테 물어보기도 했다. 누구한테 주려고 그렇게 열심히 접어? 웃음기 어린 엄마의 목소리에
그냥 심심해서 시간 때우는 거라고 둘러댔다.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다행히 더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겨우 색종이일 뿐인데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손가락 끝까지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그 작은 종이학은 내 첫사랑의 증표였다.
학을 오백개쯤 접었을 때 이석민은 나에게 버스킹을 하자고
제안했다. 땡볕에 땀을 줄줄 흘려가며 기타를 치기는 싫어 거절했지만 이석민은 포기하지 않고 징징거렸다. 야 이것도 다 추억이라니까. 한번만, 응? 아아 한번만.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이석민의 별명은 진드기다. 이런
찐득찐득한 자식. 어디 가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달라붙으면 안 되는데.
“알았어. 대신 다음부터는 할 거면 시원한 가을에 해.”
다시는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석민과 같이 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으니까.
각오는 했지만 5월
말의 홍대 거리는 예상보다도 더 무덥고 복작거렸다. 우리 말고도 버스킹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조용한
곳을 찾는 것조차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우리 가족과 이석민 다음으로 아끼는 검은색 기타를 케이스에서
꺼내 튜닝을 했고 이석민은 가볍게 목을 풀었다.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타 뒷면에 하얀 잉크펜으로 갈겨져 있는 싸인은 이석민의 것이었다. 그렇게 안된다고 했는데 바득바득 우겨서 결국 아래에다 조그맣게 싸인을 하고 하트까지 그려놨다. 연주할 때마다 지 생각 해달라나 뭐라나. 그런 거 없어도 난 만날
네 생각 질리도록 하는데.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자작곡으로 스타트를 끊었는데 2분 남짓한 곡임에도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를 맞춰주었다. 이석민은 자기가 무슨 아이돌이라도 된 것처럼 표정 연기도 하고 제스쳐도 취하고 그랬다. 여자들이 이석민을 보고 잘생겼다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녀석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금세
풀어졌다. 사실 그 자작곡은 늘 이석민의 입가에서 떠나가지 않는 미소를 보고 착안한 것이었다. 이석민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기타줄 튕기는 소리가 오늘따라 미묘하게 떨렸다는 것을 녀석은 알까
모르겠다.
그날 우리가 번 돈은 고작 삼천원이었다. 들을 거 다 들어놓고 내뺐네. 이석민이 투덜대며 같이 먹을 컵라면을
골랐다. 참깨라면 먹을까? 그거 별로야. 그럼 짜파게티? 느끼해. 180이
넘는 남자 둘이서 라면 하나 고르는데 10분이 걸리자 편의점 알바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우리는 항상 이랬다. 라면 하나,
음료 하나 고르는 데도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불닭볶음면 먹을래? 후식으로 바나나우유. 나는 적당히 좀 고르고 빨리 계산이나 하라는
알바생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매운 거 잘 못 먹는데.
“결과가 아쉽긴
했지만 이것도 다 추억이겠다, 그치?”
또 그놈의 추억 타령.
지겹지도 않냐며 녀석을 타박했지만 그래도 싫지만은 않아서 픽 웃고 말았다.
“우리 진짜 평생
친구하자. 네가 곡 쓰면 나는 노래할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석민이 컵라면에 물을 받으러 간 동안 한숨을 열 번도 넘게 쉰 것 같다. 라면은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무진장 쓰렸다.
종이학의 개수가 칠백개를 돌파했을 때 빌어먹을 사랑니가
났다. 처음에는 단순한 치통이려니 했는데 아파도 너무 아파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사랑니란다. 첫사랑을 앓듯 몹시 아프게 나는 이라고.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었으면
하고 기도했다.
이석민은 나한테 사랑니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깔깔 웃어댔다. 아파 죽겠다는 친구를 보고 요란히도 웃는 게 얄미워서 막 째려봐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민규
짝사랑하는 애라도 있어?”
“뭐라는 거야. 꺼져 새끼야.”
이석민은 그날 하루종일 나만 보면 사랑니의 안부를 물었다. 네 사랑니는 잘 계시다니? 그럴 때마다 존나게 잘 계시대, 하고 뾰루퉁하게 대답하면 뭐가 그리 좋은지 또 실실거렸다. 송곳니에
사랑니에 별의별 게 다 난다며 손뼉까지 쳤다.
“아씨 송곳니 얘기하지
말라니까.”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햇빛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석민은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냅두고 다른 애들과 축구를 하러 갔다. 나는 치통을 핑계로 급식도 거르고 점심 시간 내내 운동장만 내려다봤다. 한낱
치기 또는 일시적인 방황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이제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성장해버렸다. 난 이석민이랑
친구로라도 남고 싶은데 내 몸은 그럴 생각이 없나보다.
“아 내가 단명하면
다 이석민 때문이야…”
괜히 서러움이 울컥 차올랐다. 봄은 이제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놈의 사랑니는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차고 넘치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아파야
끝이 날까.
마침내 완성한 종이학 천마리는 커다란 유리병 안에다가
차곡차곡 주워담았다. 알록달록한 종이학들을 보고 있자니 뿌듯하다가도 이석민 생각에 금방 우울해졌다. 예전에는 혼자서 궁상 떠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는데 이제는 틈만 나면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하다하다 불면증까지 앓기 시작했다. 너무 졸려서 이번에는 진짜 잘
수 있겠다 싶다가도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하면 훅 끼치는 이석민 생각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이다. 양을
오백마리 세어도 소용이 없었다. 수면제나 다름없는 국어 선생님 목소리를 수업 시간에 몰래 녹음해서 머리맡에
틀어봐도 헛수고였다. 심지어 어제는 눈물까지 났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져서 소리를 죽이고 꺽꺽 울었다. 이석민은 내 속도 모르고 아침에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난 나를 보고 허리를 젖혀가며 비웃었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무렵 기어코 감기에 걸렸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부실하게 먹으니 면역력이 떨어질 수밖에.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라며 카톡으로 나를 실컷 놀려먹던 이석민은 그래도 꼴에 친구라고 방과후에 집까지 찾아왔다.
희여멀건 내 안색을 보고 녀석은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는지 나를 침대에 억지로 눕혀놓고 별 호들갑을 떨었다. 너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사실 정말로 치료가 필요한
건 곪아터진 내 마음이었지만 놈이 그걸 알 리가 없다. 침대에서 한발짝도 나오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하고
약속까지 받아내고 나서야 이석민은 오는 길에 사온 죽을 꺼내들었다.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감기야 감기는. 내가 너 잘 때 이불 걷어차는 버릇 고치라고 했지. 덥다고 옷 얇게 입고 다니지 말고.”
이석민은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서늘한 손바닥에 그제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야
너 학원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이석민이 기겁을 하며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야 야 말하지 마.
“지금 학원이 중요하냐. 내 학원 걱정할 시간 있으면 빨랑 자고 낫기나 해.”
치. 지가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챙겼다고. 바보같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두 눈을 감았다. 이석민 생각에 그렇게 많은 밤을 꼴딱 새웠었는데 정작 이석민이 바로 옆에 있을 때는 졸음이 잘도 밀려왔다. 오래간만에 몸이 느슨해졌다. 아무래도 저 호박죽은 한숨 자고나서
먹어야 할 것 같다.
“아 맞다.”
이석민이 듣기 좋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음물로 샤워라도 한 듯이 눈이 번쩍 뜨였다. 이석민이 눈치채기 전에 표정을 애써 가다듬고
녀석의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이석민은 답지 않게 부끄러워 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아 그니까… 내가 먼저 고백했는데 나도 걔가 받아줄 줄 몰랐거든.”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꾸역꾸역 참았다. 처음이었다. 형체도 없는 목소리가 이렇게도 아플 수 있구나, 라고 느낀 것은.
“너한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어.”
나한테? 왜? 내가 뭔데?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뭐가 돼? 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지도 모르고 몇날
며칠을 홀로 끙끙 앓았던 나는? 병신이 된 기분이었다. 창문
밖에서 매미 떼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이석민은 민망한지 딴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짤막한 정적이 흐른 후 억지로 목소리를 내었다.
“씨발 너만 솔탈하냐.”
아까보다도 더 갈라진 목소리였다.
“쨌든 축하. 다음에 소개시켜줘.”
바보같다, 진짜.
이석민은 그 뒤로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숙제가
있었고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등등 쓰잘데기 없는 얘기들을 한시간이나 주절거렸다. 나는 녀석의 말을 경청하는
척 했지만 이미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이석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 갈게. 푹 쉬고 빨리 나아.”
이석민은 다정하게 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잘 가, 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방을 나서던 이석민의 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웬 종이학이야?”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었다. 감기도 사랑니도 아파 죽겠는데 왜 이석민까지
저러고 난리야.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결국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웅얼거렸다.
“…받은 거야.”
“뭐야. 나한테 솔탈했다고 뭐라 그러더니. 너도 조만간 하겠네.”
이석민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나는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겠네.
이석민이 돌아가고 나는 그동안 접었던 학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휴지통에 쏟아냈다. 내 몸 속에서 토해낸 수많은 기억들 대신 그날 밤을, 그 하루를, 그 계절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내가 소화하기엔 너무 버거워서 결국 체하고 말았지만 고통은 금방 지나갔다. 사랑니는
그 뒤로도 꽤나 오랫동안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는 빠지지 않았다. 감기 기운이 완전히 달아나고, 운동장을 내려다 보는 짓을 관두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잠을 자고. 그리고 나서야 겨우겨우 사랑니를 빼낼 수 있었다.
“민규야. 석민이 여자친구 생겼다며? 석민이 엄마가 그러던데.”
“응 그렇다더라.”
“너는 뭐 사귀자는
애 없어? 그러고보니 너 저번에 학도 접고 막 그랬잖아. 좋아하는
애 있었던 거 아니야?”
김민규에게 이석민은 언제나 꼬리표같은 존재였다. 어디를 가든 그의 이름이 따라오지 않는 데가 없었다. 1등을 하면
“이번에는 석민이를 이겼구나”,2등을 하면 “이번에는 석민이가
이겼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덕분에 3학년 1반의 김민규는 13반의
이석민을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이석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석민은 —당연히— 신입생 대표였고 민규는 졸린 눈으로 늘어지게 하품하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하나였다. 목끝까지 단추를 꼭꼭 채운 남학생이 인사를 하건 말건 그건 민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민규의 머릿속에는 전날 밤 정주행을 미처 끝내지 못 했던 웹툰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도 용케 그날의 이석민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마이크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서 잠 깨기에
직빵이었기 때문이다.
과학 선생이던 1학년
담임은 이석민을 유별나게 아꼈다. 민규네 반에 수업을 하러 와서는 한 교시 내내 이석민 얘기만 하고
간 적도 있었다. 민규는 그놈의 이석민이 누구길래 담임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나 궁금했지만 굳이
나서서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나았다. 더군다나 민규의 반은 3층이었고 석민의 반은 4층이었다. 점심시간에 민규는 잠을 보충하기에 바빴고 석민은 교실에
틀어박혀 예습만 했다. 이렇듯 접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어쩌다 복도에서 스쳐도 서로가 그
‘김민규’와 ‘이석민’임을 알아보지 못 했다.
민규가 석민을 신경쓰기 시작한 건 1학년 기말고사 성적이 나온 날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처음으로 1등 자리를 놓쳤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공부는 그냥 시간이나 때우려고 하는 정도였고, 가업을 잇는다는 명목
하에 대학도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민규의 관심을 끈 것은 자신의 점수가 아니라 1등이라는 숫자 옆에 적혀 있는 낯익은 이름 세 글자였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지난번 중간고사에서 자신과 1점 차이로 2등을 했었던, 그리고 담임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이름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내가 1점 차로 2등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로 올라가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로 뒤에 인기척 없이 서있던 남학생과 어깨가 부딪쳤다.
“미안.”
민규의 사과에 자신이 부딪힌 줄도 모르고 있던 학생이
눈을 깜박거렸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긴 게 딱 제 엄마가 좋아할 법한 얼굴이었다.
“응? 아아 괜찮아.”
민규는 눈까지 접어가며 환하게 웃는 그 학생의 명찰을
내려다봤다. 이번 기말고사 1등의 주인공이었다. 교칙을 어기지 않는 단정한 차림새에 서글서글한 미소. 민규는 왜
담임이 그토록 이석민 이석민 하는지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2학년이 되면서
민규와 석민은 같은 반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꽤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 지, 학생들도 아닌 선생님들 사이에서 “2학년 3반은 인간적으로 상대 평가 금지시켜야 돼.”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야 너네 반 존나 재밌겠다. 같은 사진부의 권순영 선배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민규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김민규와 이석민 중 누가 더 공부를 잘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누가 더 사람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석민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학급회장이었고 민규는 누가 다가오기도 전에 먼저 거리를 두는 아싸에 가까웠다. 싸가지없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워낙 선을 명확하게 긋고 다니다 보니 웬만큼 낯짝이 두꺼운 사람들도 민규에게 말을 붙이지 못 했다. 사실상
민규에게 거리낌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석민이 유일했다.
민규가 보기에 석민은 공부하는 기계 같았다. 재수없게 들리겠지만 민규는 딱히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성적이 곧잘 나오는 편이었다. 수업 시간에 졸지만 않으면 1등은 우스웠고 설령 졸더라도 대략적인
맥락만 이해하면 어려운 문제도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반면 석민은 모두가 인정하는 노력파 천재였다. 물론 머리가 타고나게 좋은 것도 있지만 정말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다. 공부를 정말 좋아한다기 보다는 잘해야만 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민규는 그런 석민이 가끔 안쓰러웠다. 게다가 석민은 학생회니 방송부니
학교 행사니 하는 것들에도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야 했고 그 와중에 친구들과의 원만한 관계도 유지하려 애썼다.
민규는 석민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이거나 완벽주의자 둘 중 하나일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꼭 저런 애들이 사고치는데. 민규는 혀를 쯧쯧 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석민은 민규를 굉장히 편안하게 여겼다. 그와 있으면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평소 석민과
별로 친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민규는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너한테는 뭐든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석민이 그렇게 덧붙였다.
“정말?”
“어?”
“…아니야.”
민규는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자기가 더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석민은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쓰게 웃었다.
“정말이야.”
민규는 그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했다.
1학기 중간고사가
일주일 남았을 때쯤 학교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아래 학년의 여학생이 갑자기 원인 모를 자살 시도를 한
것이다. 음악실 커튼 뒤에는 미처 닦이지 못한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공교롭게도 민규의 엄마는 그 여학생의 엄마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민규는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졸지에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여자아이의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온통
새하얀 병실 안, 새하얀 침대 위에 누워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한그 여자아이는 뜬금없는 민규의 방문에도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민규는 할 말을 찾지 못 해 멍하니 서있다가 근처에 세워져
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와 앉았다. 여자애는 멀뚱멀뚱 민규를 쳐다보고 있었고 민규는 가만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자살하려 했다며.”
초면에 너무 무례했나.
민규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여자애는 상처받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로 상처받지 않은 건지는 알 길이 없겠지만.
“네.”
“왜?”
“살기 싫어서요.”
“사는 게 재미없어서?”
“…설마 사는 게
재미없다고 목숨을 끊으려 하겠어요?”
“음…”
민규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허공을 응시했다. 가능할 것도 같은데. 사는 게 재미없다고 자살하는 거. 하지만 민규는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어색한
정적이 병실 안을 짓눌렀다. 시계 초침이 딸칵 딸칵 소리내며 움직였다.
“오빠.”
“어?”
“한 사람을 너무
많이 좋아하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대요.”
“…”
“그래서 죽으려고
했어요.”
민규는 또 한번 침묵을 선택했다.
석민은 성적에 그렇게 집착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이라고
하면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민규와도 친해지고 싶어했다. 민규는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는 석민을 구태여
막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혼자 지내는 것에 길들여진 민규는 누군가와
함께 걷고 놀고 먹고 대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혼자인 게 편했다. 석민은 그런 민규를 처음부터 다시 길들이려는 듯이 그에게 차근차근 다가갔다.
마치 너와 나는 언제나 함께여야 해, 라고 세뇌시키는 것만 같았다. 민규는 꼭두각시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석민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민규는 뒷걸음질쳤다. 사람은 무서웠고 석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석민은 자신을 무서워하는
민규를 모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민규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 거라고 믿고 기다렸다.
“민규야. 너 왜 나 피해.”
석민과 민규가 3학년으로
올라가고 반이 바뀌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석민이 기다리다 지쳐 먼저 말을 꺼낸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한 사람을 너무
많이 좋아하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된대요.’
왜 그 순간 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민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냥. 내 정체성을 잃어버릴까봐.”
그게 뭐야. 석민은
어이없는 대답에 실소를 터뜨렸지만 민규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대답에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지난 2년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미지수 X의 값을.
“민규야. 너
고3이잖아. 지금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니.”
“저 대학 안 가요.”
“제발 그런 소리
좀 그만하고. 공부도 잘 하는 애가 대학을 안 가면 어쩌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 뭘 몰라서 그런 배부른 소리 하는 거야. 대학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담임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민규는 저번 시험에서 반 5등으로 떨어졌다. 전교가 아니라 반 5등. 석민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어왔지만 민규는 늘 그랬듯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냥 좀 쉬고 싶었다. 애초에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손을 놔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실행에 옮긴 것 뿐이었다.
확 자퇴해버릴까.
민규는 교실로 돌아와 책상에 얼굴을 파묻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졸업만큼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 딱 졸업까지만…
집에 돌아가서 오랜만에 수학 공책을 꺼내들었다. 당연히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새 페이지를 찾아 그
위에 이석민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었다. 그 옆에 또 이석민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적었다. 이석민 이석민 이석민 이석민… 한 페이지를 다 쓰고 두번째 페이지도 쓰고 팔이 저려올 때까지 쓰고 쓰고 또 썼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서 무작정 이름을 쓰고 본 건데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정할게. 너를
좋아해. 아주 많이 좋아해. 누군가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찬
종이 위로 눈물이 번졌다.
“선생님.”
“어 그래 석민아. 무슨 일 있니?”
“그게… 요즘 민규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민규 선생님 반 맞죠? 혹시 아픈 건가 걱정이 돼서요.”
석민의 말에 민규의 담임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여행을 갔다거나 단순 감기라는 답변을 기대했던 석민은 그 웃음에 불길함을 감지했다. 선생님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석민을 불렀다.
“석민아. 네가 그래도 민규랑 가장 친한 애인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민규가 얼마 전에 자퇴서를 냈어.
고요하고 아득한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9월의 공원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추웠다. 매섭게 몰아치는 가을
바람에 석민은 코트 옷깃을 여미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해가 하늘에 떠있을 때부터 기다렸으니 어림잡아 두세 시간은 죽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역시 전화로 할 걸 그랬나. 문자라서 보지 못 했을 지도 몰라. 이제 와서 문자를 보내기엔 핸드폰은 이미 방전되어버렸다. 아니면
문자를 봤는데도 무시한 건가. 석민은 후자 쪽도 무시할 수 없다 생각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지 뭐.”
석민은 혼잣말을 읊조리며 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팔짱을
꼈다. 이대로 민규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얼어죽을 때까지 버텨볼 작정이었다. 무슨 사정이길래 아무 말없이 자퇴까지 감행했는지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기 전에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자습을 하고 있었겠지만 지금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민규가 모습을 감춘 지 이제 겨우 2주째인데 체감상 2개월은 된 것 같았다.
“…이석민.”
낯익은 음성에 석민이 고개를 꺾었다. 뛰어왔는지 볼이 빨개진 민규가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석민은
달랑 가디건 하나만 입고 온 민규를 보고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야 미친 놈아. 오늘 날씨가 어떤데 이따구로 입고 오면 어떡하냐.”
“그러는 너는 오늘
날씨가 어떤데 미쳤다고 밖에서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 나 핸드폰 꺼둬서 문자를 방금 전에 확인했다고.”
민규가 울상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석민이 제가 하고 있는 목도리를 급하게 벗어 민규의 목에 감아주었다. 해질녘
아래에서 보는 민규는 못 본 새에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다고 와락 껴안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한테 할 말 없어?”
민규가 석민의 눈을 피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석민은 민규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미안.”
“그거 말고.”
“나 원래부터 대학
진학할 생각 없었어. 가업을 이으려고.”
“그게 자퇴할만한
이유가 되진 못 해. 적어도 졸업은 할 수 있었잖아.”
“석민아.”
석민의 숨이 막혔다. 민규는
언제나 석민을 저기, 야, 너, 라고만 칭했지 이름을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좋아해.”
“……뭐?”
석민이 되물었다. 민규의
두 눈은 전에 없이 결연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친구로 지낼 수 있을만큼 착하지 못 하고 내 감정을 버릴 수 있을만큼 강하지도 못 해. 그래서
도망쳤어. 네가 눈 앞에 없으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소리도 있잖아.”
근데 아니더라. 민규의
뒷말은 석민의 입술에 먹혀들어갔다. 갑자기 훅하고 들어온 석민의 향기에 민규가 휘청거렸다. 석민이 팔을 뻗어 민규의 등을 받쳤다. 서투르고 긴박한 입맞춤이
서로를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민규의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민규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석민의 교복 셔츠를 움켜쥐었다. 석민은
민규의 얼어붙은 양 뺨을 감싸쥐고 입술을 떼어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석민이 뒤를 돌았다. 그의 목은 땀범벅이었고 머리카락은 온통 까치집이었다. 후드티 차림의 민규가 그에게 물통을 던져주었다.
“도겸이라고
부르라니까.”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민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석민은 말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규는
석민의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했다.
“웬일이야. 요즘 바빠서 못 올 줄 알았더니.”
“오늘 비번이야.”
“공연은
어땠어?”
“저번보다
더 화려해졌더라. 난 그게 제일 좋았어. 불구덩이에서 탈출하는
마술.”
민규가 참새처럼
열심히 조잘거렸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석민이 하얀 자켓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오늘 영하까지 떨어진대. 그제서야 민규는 겉옷을 차에 두고 왔단
걸 깨달았다. 어깨에 걸친 정장 자켓에서 석민의 장미 향기가 났다.
“네로야. 너 하얀 옷 입으니까 더 까매 보인다.”
“네로라고
하지 말랬지.”
“왜. 딱인데.”
검은 고양이
네로. 석민이 그렇게 덧붙이며 민규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검지로 쓸어내렸다. 간지러운지 민규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네가 사는
거야?”
“당연하지.”
“어머 오빠
멋있어요.”
꼭 이럴
때만. 석민이 밉지 않게 민규를 흘겨봤다. 민규가 자신의
차 키를 건네주며 웃었다. 석민이 키를 받아들려는 찰나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낯익은 전화번호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받아? 민규의 목소리에 석민이 나지막히 대답했다. 받아야지.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통화 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민규는 석민의
심상치않은 반응에서 상황을 짐작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통화가 꽤나 길어질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석민의 과거라면 민규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도겸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유도, 뒤늦게 마술사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러게.”
-오늘 공연 잘 봤어. 관객도 많이 왔던데. 돈 잘 벌겠다?
“그렇지도
않아.”
-왜.
우리랑 있었을 때보단 잘 벌겠지.
저열하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석민은 기분 나쁜 기색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글쎄. 그래도 그때보다 덜 시궁창 같긴 하네.”
-그 나불거리는 입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옛 동료인데 말이지. 좀 더 친절하게 말해보라고.
“동료는
무슨.”
석민은 욕을
삼키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너네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끊어.”
-되게 고상한 척 하네. 너도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주제에.
석민의 시야가
노래졌다.
-너도
결국엔 살인자잖아. 안 그래?
석민은
냉담한 얼굴로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민규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괜찮냐?”
“…네로야.”
“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민규는 잠자코 그를 기다렸다.
“네로야.”
“아 왜.”
석민은
그 뒤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
석민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였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사흘 뒤에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석민보다 석민의 어머니를 더 사랑했다. 그는 석민이 젖먹이일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구타했다. 때로는 아이가 혼절하기 직전까지 목을 조르기도 했다. 석민에게 폭력은 일상이었고 그것을 감내하는 것은 숙명이었다.
“네 엄마
대신 네가 죽었어야 돼.”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에 대한 석민의 대답은 매번 어쩌라고요, 였다. 찍소리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것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때리면 때릴수록 더 발악했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호구처럼 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석민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즈음이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의 머리채를 끌었고 석민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계단을 잘못 디딘 것은 명백한 사고였다. 그는 쓰러지면서 계단 모서리에 몇번이고 머리를 부딪혔다.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다리뼈가 뒤틀렸다. 석민이 계단 아래로 급히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어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석민은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15분 후 과다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사망 원인은 사고사로 기록되었지만 석민은 이때부터 자신을 살인자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석민은 어렸고
방세는 비쌌다. 밤낮 없이 일하고 학교 대신 편의점으로 출석 도장을 찍어도 하루 벌어 하루 쓰는 꼴이었다. 공중화장실만도 못한 지저분한 원룸에 살면서 석민은 늘 일에 치이고 외로움에 치였다. 이러다가는 수면 부족으로 죽거나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고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였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석민은 범죄조직에 처음으로 발을 담궜다.
처음 3년은 마약을 운반하고 그 다음 5년은 청부업을 했다. 비밀 루트를 통해 조달받은 글록은 그의 허리춤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방아쇠를
몇번 당기는 것만으로도 수천만원이 굴러들어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마음 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석민이 조직을
나오기로 결심한 것은 비가 요란히도 내리던 새벽이었다. 그는 약속된 시간에 특정 인물을 사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늦여름의 장맛비가 코트깃을 적셨고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담뱃불도 제대로 붙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담뱃대는 하수구에 버렸다. 저
멀리서 이른 동이 트고 있었다. 석민은 장거리 사격을 위해 근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라이플을 펼쳤다.
경찰복을
입은 민규가 옥상으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민규는 석민과 라이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석민은 바보처럼
눈만 껌벅거렸다.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좆됐다.
아닌 밤중에
추격전이 벌어졌다. 석민은 조립하던 라이플을 내팽겨치고 옥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이동하는 동안 민규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간발의
차이로 석민이 먼저 아래에 도착하고 어지러운 골목길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의 뒷모습을 포착한 민규가
그를 따라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민규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고 석민에게는 집과도
같은 편안한 곳이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민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석민은 길을 잃은 민규가 당황한 틈을 타 그의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여어, 형씨. 미안한데 지금 좀 바쁘거든.
상관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제발 얌전하게 굴어.”
민규는 대답 대신 석민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석민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자 민규가 그의 몸을 거세게 짓눌렀다.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 폭우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석민의 무릎이 민규의
복부를 가격함과 동시에 민규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팔뼈 부러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때를 놓치지 않은 민규가 석민의 몸 위에 올라타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석민이
항복의 표시로 부러지지 않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 방심했네.”
“…”
“너 몸
되게 좋네. 우리 조직에 들어올 생각 없어?”
“그게 경찰한테
할 소리냐?”
“왜. 조직일도 나름 수입 짭짤해.”
석민이 생글생글
웃었다. 민규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양심 죽이면서
살 바에는 차라리 굶어 죽는게 낫겠다.”
“정말로?”
그렇게 묻는 석민의 목소리에서
위화감이 풍겼다. 민규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석민을 빤히 내려다봤다.
“돈 잘
벌 수 있는 직업 소개시켜줄게.”
“…”
“나 아는
사람 중에 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몇 있어.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니까 아마 너도 받아줄 거야. 잘하면 마술 교육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뭔 소리야?”
“조건은
네가 몸 담고 있는 그 조직에서 나오는 것.”
석민이 별
이상한 걸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기껏 범죄자를
잡아놓고 풀어주겠다는 건가? 일자리까지 제공해주고?
“…나야
잃을 건 없지. 그런데 경찰이 마음대로 그래도 돼?”
“괜찮아. 난 원래 제멋대로거든. 그리고…”
“…”
“오빠는
잘생겼으니까. 봐주지 뭐.”
예상 외의
답변에 석민이 숨 넘어갈 듯이 웃었다. 좋아. 석민이 민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직을 나가려는 사람은 모두 목숨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석민은 민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석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숨만 붙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했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그를 이 지옥 같은 삶에서 해방시켜 줄 수만 있다면 그깟 목숨
정도야 흔쾌히 버릴 수 있었다.
***
“뭐 먹고 싶어? 오랜만에 스테이크나 썰까?"
“나야 네가 사준다면 뭐든 땡큐지.”
석민이 민규의 안전 벨트를 매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저번에 원우 형이 좋은 레스토랑 추천해 줬었는데 거기 가자.”
밤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제법 한산했다. 석민이 운전하는 차가 도로를 막힘없이 달렸다. 대기실에서의 통화 내용도 잊을만큼 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을 밝혔다.
“달 예쁘네.”
민규의 중얼거림에 석민이 피식 웃었다.
“뭐야 고백이야?”
“어?”
“나쓰미 소세키가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민규가 창밖을 바라보며 그런 거 아니거든,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석민은 그의 반응을 즐기며 운전대를 옆으로 꺾었다.
“이석민.”
민규의 부름에 석민이 고개를 돌렸다. 민규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된 채였다.
“너도 눈치챘지.”
“아아. 응. 조금 전에.”
“어쩐지 운전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더라.”
민규는 뒤에 따라붙은 검은색 차량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일반인이라고 보기에는 집요할 정도로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석민이 오른손으로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오랫동안 잡아보지 않았던 글록이 그 형체를 드러냈다.
“이야. 지금 경찰 앞에서 총 꺼낸 거야? 총기 사용 불법인데.”
“잘생겼으니까 봐주라.”
석민이 눈을 찡긋거렸다. 민규가 웃음을 터뜨리며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권총을 꺼내들었다. 석민이 잠금장치를 해제한 것이 신호탄이 되어 민규가 차문을 활짝 열었다. 그가 쏜 탄환이 그대로 날아가 앞 타이어에 박혔다. 두번째는 빗나가고 세번째는 창문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방탄인가 보네.”
민규가 남은 총알을 모두 난사했다. 타이어에 명중한 모양인지 결국 검은색 차량이 뒤집어져 전복했다. 석민의 차가 코너를 돌자 대기하고 있던 또다른 다섯 대의 차가 어둠을 뚫고 뒤따라왔다.
“전(前) 조직원 하나 잡으려고 도대체 몇이나 출동한 거야.”
석민이 창문 틈새로 열심히 저격하며 짜증을 부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꽤나 끈질기게 따라올 것 같았다. 어쩌면 저 다섯 대가 전부가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80%를 웃돌았다. 석민은 민규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민규는 사격에 열중해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 했다. 석민은 내비게이션을 끄고 무작정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을 만한 곳으로 유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석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총탄이 먼저 떨어진 쪽은 당연히 민규와 석민이었다. 둘 다 총이라고는 한 자루씩이 전부였고 비상용 총탄 따위 갖고 다닐 리 만무했다. 석민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려 최선을 다해봤지만 이미 뒷타이어는 바람이 빠지고 있었다.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해봤는데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대.”
민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차 타이어가 수명을 다한 곳은 이름 모를 바다와 낮은 보호벽이 앞을 막고 있는 고속도로 한복판이었다. 허공을 멍하니 노려보던 석민이 안전 벨트를 풀었다. 민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따라 풀려 하자 석민이 그를 막았다.
“넌 내리지 마.”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민규의 뇌리를 스쳤다. 석민은 차 문을 닫고 고속도로 보호벽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보호벽은 석민의 허리에 겨우 닿는 높이였다. 석민과 민규를 추격하던 검은 차량들이 잇따라 들어와 민규가 타고 있는 차 바로 뒤에서 멈췄다. 석민은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반기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민규가 석민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석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민규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석민은 민규의 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넌 이제부터 네로야.’
‘네로?’
‘검은 고양이 네로. 피부가 까맣잖아.’
왜 예전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사실 네로라고 부르는 이유는 피부색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 마주했던 그의 눈이 마치 고양이 같아서. 조직에서 나오라며 자신을 회유하던 그 눈빛이 예뻐서. 그래서 네로였다.
“네로야.”
“…응.”
“5초만 눈 감아 봐.”
“왜?”
석민의 의도를 눈치챈 듯 민규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석민은 그의 눈물을 못 본 척 눈을 피했다.
“마술이야. 사라지는 마술.”
“싫어.”
민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래서 차 안에 있으라고 한 거구나. 내가 너를 막으러 달려가는 것보다 네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더럽게 약은 새끼.
“네로야.”
“싫어.”
“…”
“절대 싫어.”
검은 차에서 석민의 옛 동료들이 내렸다. 석민은 보호벽 난간에 기대앉아 민규를 불렀다.
“난 다시 돌아올 거야.”
“거짓말.”
“진짜야. 알잖아? 마술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거야. 그냥 사라지는 거에 그치면 그건 실패한 마술이지. 그리고 난 단 한번도 마술에 실패한 적이 없고.”
민규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석민은 역시 약은 놈이었다.
“민규야.”
그렇게 따뜻하게 민규야, 라고 불러버리면
“…알았어.”
민규가 밀어낼 수 없음을 석민은 알고 있었다.
두 눈을 감자 지독한 어둠이 시야를 지배했다. 매 초가 억겁의 시간처럼 흘러갔다. 민규의 기억 저편에 자리잡고 있던 수많은 파편들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하나.
‘그래서, 형씨 이름이 뭐야?’
‘김민규.’
‘잘 어울리네.’
둘.
‘넌 뭔데?’
‘이석민.’
‘안 어울린다.’
‘아 너무하네. 난 좋게 말해줬는데.’
셋.
‘네로야.’
‘김민규라는 멀쩡한 이름을 냅두고 왜 만날 네로라고 불러.’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뭔 소리야.’
‘이름을 부르면 진짜로 좋아하게 돼버릴까봐.’
넷.
‘선과 악의 기준은 뭘까. 정해진 법률에 따르면 선이고 어기면 악일까? 하지만 그 법률이 악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난 그런 거 몰라.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 선이라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건 너일 거야.’
다섯.
‘민규야. 좋아해.’
5초가 지났다. 아니, 어쩌면 몇분일지도 모른다. 3초밖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고 끝을 맺어서 정확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민규는 눈을 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달빛이 어둠을 비집고 들어왔다. 허탈한 웃음 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석민은 더이상 눈앞에 없었다.
***
그 뒤로 경찰을 동원해서 절벽 근처를 수색해 봤지만 석민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상부는 시체가 파도에 떠밀려 갔을 거라고 단정지은 듯 했다. 세간은 각광받던 천재 마술사 도겸의 실종으로 잠시 떠들썩했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목을 파고들었다. 민규는 옷깃을 더욱 여미며 몸을 움츠렸다. 코가 빨갛게 얼어붙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아 부승관 또 엄청 칭얼대겠네.”
얼마 전 실연당했다는 후배 놈에게 밥이나 한 끼 사주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웃기는 일이었다. 자기도 얼마 전에 실연당한 주제에 누가 누굴 위로해. 민규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려 목도리를 콧등까지 올렸다. 그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민규는 목도리를 아래로 떨구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장미 향기였다.
민규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운 누군가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마술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거야.
석민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민규는 점점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또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민규의 목소리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수천, 수만 번을 지우려 노력해봐도 지울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이름을.
미안해. 그것이 너의 묘비명이었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너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늦저녁의 공원은
제법 선선했다. 안개가 낮게 깔린 호수를 중심으로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공원은 밤을 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도겸, 패스해 패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듯한 앳된 얼굴의 남자 애들이 근처에서 축구공을 굴리고 있었다. 시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문득 또 네 생각이 났다.
너는 낙엽같은
사람이야. 너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계절이 변하면 색이
바래고 바람이 불면 맥없이 떨어지는, 나는 낙엽이라 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낙하하는 그 순간만큼은 꽃보다 더 아름다우니까 나는 낙엽이 좋았다.
발에 채이는 돌맹이
하나를 주워 호수에 힘껏 던져보았다. 잠잠하던 호수에 파동이 일더니 물결이 동그랗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나도 저랬다. 누군가가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해도 남몰래 혼자 아프고 혼자 흔들렸다. 그리고
혼자 다시 일어서야 했다. 나를 일년 가까이 스토킹하던 한 학년 위의 선배도, 급식판을 내 머리 위에 부어버리던 같은 반의 남자애도, 나는 완강하게
뿌리치지 못 했고 뿌리쳐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 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나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는 언제나 사람들을 몰고 다녔고 어디에 가든
네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네가 웃는 것을 볼 때면 괜히 나까지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는 그런 너를 동경했다.
우연히 너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던 날을 너는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았고 나는 왼손잡이였다. 글씨를 쓸 때마다 너와 손등이 맞닿았다.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필기를
열심히 했다. 왼손이 막 화끈거렸다.
네가 내게 먼저
다가왔던 날을 기억한다. 정확히 재작년 5월 3일이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누군가가 건 발에 걸려
넘어졌고 어디선가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귓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는 넘어진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먼저 허리를 숙여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괜찮아?’
그렇게 묻는 너의
목소리가, 너의 손길이, 너의 미소가, 너무 반가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건넸을 그 한 마디가 나에게는 외로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같은 대학에 합격했다. 물론 필연이었다. 내가 일부러 너와
같은 학교를 선택했으니까. 그 뒤로, 나의 바램대로, 우리는 친해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내게 너는 유일한 탈출구였고
내가 찾은 행복이었다. 너는 나의 가족이자 친구였고 연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너는 나를 친구로서 사랑했고 나는 너를 이성으로서 사랑했다. 다르지만
일맥상통했다. 나는 너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를 배웠다. 또 혼자 시작한 짝사랑을 혼자 끝내는 법도 배웠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너를 정말 많이 사랑했고 너에게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끝내 너에게
고백하지 못 했다. 돌아올 대답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이젠 익숙하다.
네가 옥상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아직도 알지 못 한다. 나는 너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느꼈다. 그날 밤도 오늘처럼 안개가 자욱했다. 나는 밤안개를 방패삼아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안개가 걷히고 저
멀리서 동이 틀 때까지 계속 울었다.
너의 묘에 들렀을
때, 좋아한다고 뒤늦게라도 고백하려고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 했다.
결국 끝까지 말은
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널 참 많이 좋아했다. 나는 너
덕분에 삶 다운 삶을 살기 시작했고, 죽음을 두려워할줄 알게 되었다.
생존은 무언가를 즐기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네가 만든 세계에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너의 세계에 머물고 싶었다.
사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좋아한다는 것보다도, 고맙다고... 그래,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와 김민규는 사실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였다. 나는 김민규를 좋아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김민규도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물론 대놓고 말이 오간 적은 없다. 그냥 우리들만의 암묵적인 비밀 같은 거였다. 남들 눈에 우리는 평범한 소꿉친구였다. 둘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은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같이 숙제를 하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핸드볼을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이석민.”
“왜.”
“나 여자친구 생겼다.”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우리의 관계에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김민규였다.여자친구라며 데리고 온 애는 딱 김민규 판박이였다.적당히 예쁜 눈에 적당히 큰 키에 적당히 소탈한 성격.누가 봐도 김민규 스타일은 아니었다.김민규는 아담하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했다.그럼에도 선뜻 그 애와 사귀고 굳이 내게 소개까지 시켜주는 녀석의 저의는 안 봐도 뻔했다.김민규는 내가 그 애를 좋아해주길 바랬다.자신이 아니라 그 애를 좋아해주길 바랬다.노력은 가상했지만 난 그 애와 사귀지 않았다.첫번째는 친구의 여자친구를 뺏고 싶지 않아서였고 두번째는 난 김민규가 아니면 필요 없었다.김민규는 정확히 나흘 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뒤로 한동안 김민규를 보지 못했다.함께 집에 돌아가려고 녀석의 반에 찾아가면 이미 빈 의자만이 그곳에 나뒹굴고 있었다.여자친구와 헤어져서 상심이 큰가 보지,하고 넘기기엔 무리가 있었다.김민규는 그 애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설마 아픈 건가,하는 생각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녀석은 원체 몸이 건강한 편이라 웬만해선 그 흔한 감기마저 걸리는 일이 없었다.대신 어쩌다 잘못 걸리면 정말 크게 앓아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학교 끝나고 기다리라는 문자를 보내도 답장 한 통 오지 않아서 정말 아픈 건가 보다,하는 생각이 굳혀졌다.마지막 교시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급하게 둘러매고 무작정 달렸다.벌써10년 넘게 드나들어서 이젠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녀석의 집에 찾아가 역시나 바뀌지 않은 비밀번호를 눌렀다.마침 녀석의 엄마가 외출을 하려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계셨다.
“어?석민이니?민규는 집에 없는데.”
“아…요즘 민규가 안 보여서 혹시 무슨 일 있나 하고요.”
“아마 태권도 학원 갔을 거야.얼마 전부터 다니기 시작했거든.걔가 말 안 해주던?”
정말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누구는 지 걱정에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손톱이 피가 나도록 물어 뜯었는데 정작 본인은 태평하게 태권도나 배우러 갔다니.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길래 아픈 줄 알았어요.”
“아,오늘 핸드폰 두고 갔더라.”
뜬금없이 웬 태권도야 태권도는.짜증이 치밀었다.구겨진 미간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녀석의 집에서 나왔다.진짜 가지가지한다 김민규.이 와중에 더 짜증나는 건,그래도 아픈 게 아니라는 소리에 짜증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는 거다.이쯤되면 중증인 게 분명하다.
다음 날,점심 시간에 도서실 구석에 처박혀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김민규를 찾아냈다.밥도 안 먹고 이런 곳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으니 학교에서 얼굴을 못 보지.녀석을 보면 화부터 내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짜증이고 뭐고 존나게 예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그냥 한숨만 푹 쉬고 비어있는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녀석은 내가 왔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 한번 들지 않았다.
“너 태권도 학원 다닌다며.”
“응.”
“뭐 배우는데?”
“지금은 낙법 배워.”
“그딴 걸 왜 배우냐.”
“왜?존나 유익하지 않냐.언제 어디서 어떻게 넘어질 지 모르는 건데.”
“네가 넘어지지 않게 내가 항상 잡아주면 되지.”
“아 그렇네.”
김민규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종소리가 울렸고 그제서야 김민규는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핸드폰 게임을 껐다.나는 교실로 올라가는 김민규의 뒷모습을 보며 녀석의 귀가 빨갛게 물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
김민규는 그날 태권도 학원을 끊었다.그래도 네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게 계속 다니는 게 좋지 않겠냐 했더니 네가 지켜주면 되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참 김민규다운 답변이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김민규는 웃지 않았다.그것이 김민규 나름의 고백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일분이 걸렸다.나는 녀석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김민규와의 연애는 딱 두 달로 끝이었다.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무덤덤했다.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알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나는 김민규를10년 동안 좋아했고 김민규는 그런 나를10년 동안 방관했으니까 이제와서 연인 행세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거다.아마 나와 사귄 건 단순한 호기심,혹은 순간의 충동.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이해할 수 있었다.김민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다가 먼저 자리를 떴다.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익숙한 광경이었다.김민규는 어디론가 향하고,나는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남아 녀석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익숙한 광경,익숙한 상황,익숙한 관계.가만히 앉아 김민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막 떨어졌다.역시 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좀 잔인한 것 같다.감정이란 게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직 쌀쌀한 초가을이었지만 나는 외투도 입지 않고 집 앞 공원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감기라도 걸렸으면 해서.왠지 아프고 싶은 날이었다.이어폰에서 좋아하던 노래가 흘러나왔다.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