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떻게 생각해?
건조한 눈동자가 물었다.
창밖으로 흰 눈발이 날렸다. 온 거리가 하얀 물결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멀고 아득한 설산에 홀로 고립된 조난자가 되어 눈을 느리게 꿈벅였다.
“민규야.”
침묵을 유지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원우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에 안 든다는 거 잘 알아. 근데 이거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
“민규야.”
선배가 재촉하듯 이름을 불렀다. 한참을 잘근잘근
공들여 씹다가 내뱉는 것이 아닌, 미끄럼 타듯 혀를 쭉 훑고 나온 글자 석 자였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의 뺨에 남은 푸르스름한 멍자국이 자꾸만 시야에 아른거려서였다. 생긴 지 꽤 됐음직한 그 자국은 못본 척할래야 할 수도 없이 새하얀 피부 위에 큼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잘 생각해봐. 그럼 난 갈게.”
차가운 거실 바닥에 선배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발끝을
질질 끌며 걷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덕분에 그의 구두 밑창은 멀쩡할 날 없이 늘 닳아 있었다. 꼭 내 마음처럼. 너덜너덜한 넝마 같았다.
“좋아해요.”
그의 발걸음이 뚝 그쳤다. 구태여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장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미친듯이 두근거릴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불안함의 징조라는 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알아.”
이쯤되면 항상 드는 생각인데, 목소리 하나는 더럽게
좋은 사람이었다. 낮되 지루하지 않고 차분하되 차갑지 않았다. 딱히
그 부분에 반한 건 아닌데 가끔씩 사람 홀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알아.’ 예상한 대답이었다. 선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간 것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좆같은 새끼.”
그리고 버림받은 내가 혼자 우두커니 서서 욕을 읊조리는 것도,
모두 예상한 일이었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
w. 엔씨
어느덧 삼월까지 열흘도 남지 않았지만 겨울의 냉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오랜 꽃샘추위에 코끝이 붉게 물들었다.
“병신같네.”
나 자신한테 하는 소리였다. 주머니 속 칼날을
어루만지는 오른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추위 때문이었다. 분명
그랬다. 오랜만의 실전 투입이기는 했지만 그게 긴장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하지 않은가. 추위가 아니라면 아침을 거른 탓에 힘이 부쳐서일 것이었다.
‘너라면 할 수 있잖아. 그렇지?’
떠올리기 싫은 누군가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씨발, 내가 무슨 자원봉사자인줄 아나. 무보수로 사람 죽여주게.”
허연 입김이 넘실넘실 피어올랐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부탁을 받아들인 걸 보면… 진짜 병신 맞다니까 김민규. 괜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튕기기는 존나게 튕겨놓고.
애초부터 이런 말도 안되는 집단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람 죽이고 그걸로 돈 벌어 먹는 그런 집단 말이다. 아니, 그 전에, 길 잃은 어린 양한테 적선 베풀듯이 내미는 그 선배의
손을 잡는 게 아니었다.
‘아가야. 갈 데가 없니? 형이랑 갈까?’
열여덟 살이나 처먹은 애를 아가라고 부르는 인간도 웃기지만 그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인 나도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부모 잃고 이곳 저곳을 전전하던 떠돌이에게 뭐 두려운 것이 있었겠냐만은. 그 뒤로 2년이 흘렀다. 이제
선배는 나를 아가라 부르지 않고 나도 선배를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겠다.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되었다.
손에 꼭 들어맞는 나이프를 가볍게 그러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선배를 들들 볶을 생각이었다. 이걸 빌미로 섹스를
청해도 좋고, 아니면 상처받은 척 연기해가며 그 콧대 높은 얼굴에 죄책감을 드리우는 것도 좋다. 어쨌거나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건 조직 내에서 공연한 사실이었고 선배가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었으니 그
죗값은 치러줘야 할 것 아닌가.
“Who killed Cock Robin?”
I, said the sparrow… 노래를 부르며 지나는 길목마다 붉은 꽃이 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밤, 선배가 내 몸에 새겼던 흔적들처럼. 나는 조용히 입술을 축이며 미소지었다.
표적의 거주지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낡은 거리, 정확하게는
빈민가였다. 주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천막들, 오래된
가로등에서 진동하는 쓰레기 냄새. 곳곳에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집중력을 흩뜨려 놓았다. 소리 죽여 내딛는 구둣발에 꽃잎이 짓이겨졌다.
“선배가 이런 곳에서 자랐단 말이지.”
상상이 안 갔다. 원우 선배는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온실 속 화초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의 말처럼 ‘못
배우고 자란 티’는 나지 않았다. 아둔하다기 보다는 교활하다, 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당장 그의 팔뚝을 차지하고
있는 문신만 해도 그에게 딱 어울리는 뱀이었으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온갖 추잡한 짓이란 짓은 다 벌이고 다니는 비열한 놈인데. 이번에는 내가 그 ‘추잡한 짓거리’에
사용되는 장기말인 거고 말이다. 지 좋다는 사람을 이용하는 그 선배가 이상한 건지,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당해주는 내가 더 이상한 건지. 혹은
둘 다거나.
선배가 그려준 약도를 따라가 보니 과연 그가 단언한대로 파란 대문의 허름한 주택이 나왔다. 그림이 무슨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모양새길래 이거 믿어도 되나 싶었는데.
‘후배님, 나 못 믿어?’
‘믿게 생겼어요?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단 낫겠다.’
시시콜콜했던 대화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문을
두드리자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구쇼?”
“택배 기사인데요.”
“그런 거 시킨 적 없는데.”
“전윤택 님 아니십니까? 발신인 전원우 님께서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신발을 신는 듯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뭔
택배냐며 궁시렁대는 목소리에서 원우 선배의 목소리가 났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또 시답잖은 생각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성의 얼굴이 문
틈새로 서서히 드러났다. 대문이 완전히 열리고 시야가 확보됨과 동시에 칼날을 거칠게 휘둘렀다. 목덜미에 정확히 꽂힌 칼이 검붉은 핏줄기를 내뿜었다. 다시 한번
예리한 칼날로 목을 두어 번 찔렀다.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액체가 손을 적셨다. 상당한 덩치의 몸뚱아리가 반항 몇번 못하고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
아래로 핏물이 조그마한 우물을 만들며 고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확인사살을 위해 복부를 찌른 뒤 나이프를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그래, 놀라울만큼 허무한 결말이기는 해. 조직에서도 매정하기로 소문난 그 원우 선배를 25년동안 학대했다는
사람치고는 생각보다 더 평범하고 나약했다. 아무리 선배가 지금은 실전에서 손을 떼고 조직 경영에만 관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일반인이라면 우습게 해치우고도 남았을 터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살살 구슬려가면서까지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해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고.
“아무리 자신을 학대해온 아버지라도 불효자가 되기는 싫다 이건가.”
코웃음이 나왔다.
“웃기지도 않아.”
하여간 남의 손을 빌려 자기 목표를 성취하는 데는 도가 텄다.
마뜩찮은 표정으로 혀를 쯧 찼다. 맛없는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남자의 육중한 몸을 어깨에 가볍게 들쳐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의 몸에서 싸구려 담배
냄새가 났다. 왜 선배가 그토록 담배를 싫어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실
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도 그거였다. 선배를 화나게 하고 싶어서.
담배 말고도 선배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란 일은 모조리 다 해봤다. 가출도 해보고 마약도
해보고 자해도 해봤다. 가장 효과적인 건 의외로 자해였다.
아마 작년 겨울이었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직의
최전방에서 일하고 있었던 선배는 그날도 어김없이 임무 수행을 위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현장 투입에서 제외됐던 나는 하릴없이 컨테이너 박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선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화분이었다. 싹을 틔울듯 말듯 애태우고 있는 낡은 화분. 화분을 바닥에 집어던져 조각내는 것은 다섯 살짜리 꼬마애도 할 수 있다. 하물며
열아홉 건장한 청년이 못할 이유가 있으랴.
날카로운 절단면으로 손목을 짓이기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자해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그런 부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고통은 둘째치더라도 더러운 흙먼지와 이물질이 상처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은 꽤나 보기 괴로웠다. 그러다 핏줄을 잘못 건드린 모양인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고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팔 한쪽이 시뻘겋게 물들 때까지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캄캄하던
방안에 달빛이 드리울 때까지. 그리고 귀가한 선배가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선배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정신없이 깜박이고 손을 덜덜 떨면서 내 손목을 감싸쥐었다. 내내 아픈 줄도 몰랐던 상처가
기어코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몰려오는 통증에 잇새 사이로 앓는 소리를 내자 선배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민규야. 선배가 울었다. 아니, 운
건 아닌데… 울었다. 우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선배도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해는 관두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형언
불가한 욕망이나 집착 따위가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확립하게 된 사랑. 나는 그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것들을 내어주고 포기하고 희생했다. 그의 마리오네트가 되기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살인자가 되기를 거리낌없이 자청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배는 이런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선배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표적의 시체를 차 트렁크에 싣고 한참을 달렸다. 내비게이션은
켜지 않았다. 목적지는 나도 모르고 내비게이션도 몰랐다. 그냥
멍하니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무엇에 분풀이라도 하듯이 핸들을 거칠게 꺾고 엑셀을 밟았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는 지 모르겠다. 기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굴렀던 차가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바닷가 근처의 어느 절벽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퍽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아쉽게도 감상에 젖을 기분이 아니었다.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물고 트렁크를 열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시체 냄새가 트렁크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맞물려 코를 찔렀다.
“아 배고파.”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이딴 태평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걸 본다면 선배가 뭐라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키득키득,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로지르며 흐리게 피어올랐다.
“절경이네.”
바다 말고, 담배 연기가.
죽은 남자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의 셔츠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시체가 질질 끌릴 때마다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터덜터덜
불규칙적인 발걸음이 귓가를 쓸었다. 절벽 저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흰 물결이 바람에 실려 잠자코 요동쳤다. 바다 냄새는 오랜만이었다. 아닌가, 처음인가.
“알게 뭐람.”
일순간 파도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던 뱀이 덫에 걸려든 사냥감을 한 입에 꿀꺽한 것처럼. 끔찍한,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적막이었다. 시체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스르르 놓아버렸다. 그가 절벽 아래로 철푸덕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함을 뚫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도중에 나뭇가지에 몇번 걸리기라도 했는지 나무가 우지끈 부러져버렸다.
임무 수행 완료. 나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었다. 돌아가면 선배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내가
당신의 지시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왔다고 자랑하면, 기뻐할까? 슬퍼할까? 나를 원망할까?
무너져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나락 끝 그 너머를 맛본 사람처럼. 온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지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소원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었다. 알 수 없는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미련한 발걸음을 돌렸다. 반대쪽
하늘에서는 이미 초연한 초승달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고했어.”
그리고 그곳엔 선배가 서 있었다.
“이렇게 빨리 끝내줄 줄은 몰랐는데.”
심장이 덜컥, 하고 가라앉았다.
이 바닥에서 나름 베테랑인 선배는 기척을 숨기는 데 능했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체를 처음 끌고 왔을 때부터. 아니, 내가 그를 죽였을 때부터.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 다. 김 빠지는 웃음이 났다. 또 놀아났구만. 이 양반의 손바닥 안에서.
“그럼,”
선배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이 불쑥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없이 그의 눈가를 응시했다.
“착한 어린이에겐 상을 줘야지.”
그의 한 손이 뒷목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이 턱을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친 건 순식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온몸이 굳어버린 틈을 타
그의 혀가 무방비한 입술을 비집고 침입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뒷목에 닿은 선배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런 걸 바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키스하게 되자 겁이 날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갑작스럽고 불안했다. 생각만큼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몸 어딘가가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혀와 혀가 얽히고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숨을
잠깐 고르는 듯 하던 선배는 내가 눈을 희미하게 뜨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입을 맞춰왔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울려퍼졌다. 저 멀리서 파도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거세게 난동을 일으켰다. 그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선배와 나, 그리고 파도. 그게 이 진득한 밤 풍경의 전부였다. 오랜 입맞춤이 끝을 맺은 건 바다가 다시 한번 잠잠해지고 밤이 한층 더 깊어졌을 때였다. 나는 바다를 등지고 조용히 눈을 깜박거렸다. 선배의 안경알에 달빛이
비쳤다. 어색하지만 불편하지만은 않은 침묵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규야.”
낯선 목소리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고마워.”
그리고 선배의 손길이 나를 뒤로 떠밀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상황 파악할 시간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뭇잎이 스산히 흔들리는 소리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낙하하는
소리가, 파도가 흙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마저 나는 선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담담한 시선을 느끼며 왠지 그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는 줄도 모른다.
선배와 입을 맞춘 그 순간부터? 아니, 선배와
손을 처음 맞잡은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그의 울새가 된 것이었다.
Who killed cock Robin?
I, said the Sparrow,
With my bow and arrow, I killed Cock Robin.
누가 울새를 죽였나?
나, 참새가 말했네.
내 활과 화살로 내가 죽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