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이석민, 김민규
겸규전력 ; GUN / 추격
w. 엔씨
bgm ; Sting - shape of my heart (piano cover.)
“이석민.”
누군가의 목소리에 석민이 뒤를 돌았다. 그의 목은 땀범벅이었고 머리카락은 온통 까치집이었다. 후드티 차림의 민규가 그에게 물통을 던져주었다.
“도겸이라고 부르라니까.”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민규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석민은 말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규는 석민의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했다.
“웬일이야. 요즘 바빠서 못 올 줄 알았더니.”
“오늘 비번이야.”
“공연은 어땠어?”
“저번보다 더 화려해졌더라. 난 그게 제일 좋았어. 불구덩이에서 탈출하는 마술.”
민규가 참새처럼 열심히 조잘거렸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석민이 하얀 자켓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오늘 영하까지 떨어진대. 그제서야 민규는 겉옷을 차에 두고 왔단 걸 깨달았다. 어깨에 걸친 정장 자켓에서 석민의 장미 향기가 났다.
“네로야. 너 하얀 옷 입으니까 더 까매 보인다.”
“네로라고 하지 말랬지.”
“왜. 딱인데.”
검은 고양이 네로. 석민이 그렇게 덧붙이며 민규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검지로 쓸어내렸다. 간지러운지 민규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네가 사는 거야?”
“당연하지.”
“어머 오빠 멋있어요.”
꼭 이럴 때만. 석민이 밉지 않게 민규를 흘겨봤다. 민규가 자신의 차 키를 건네주며 웃었다. 석민이 키를 받아들려는 찰나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낯익은 전화번호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받아? 민규의 목소리에 석민이 나지막히 대답했다. 받아야지.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통화 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민규는 석민의 심상치않은 반응에서 상황을 짐작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통화가 꽤나 길어질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석민의 과거라면 민규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도겸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유도, 뒤늦게 마술사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러게.”
-오늘 공연 잘 봤어. 관객도 많이 왔던데. 돈 잘 벌겠다?
“그렇지도 않아.”
-왜. 우리랑 있었을 때보단 잘 벌겠지.
저열하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석민은 기분 나쁜 기색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글쎄. 그래도 그때보다 덜 시궁창 같긴 하네.”
-그 나불거리는 입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옛 동료인데 말이지. 좀 더 친절하게 말해보라고.
“동료는 무슨.”
석민은 욕을 삼키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너네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끊어.”
-되게 고상한 척 하네. 너도 우리랑 다를 바 없는 주제에.
석민의 시야가 노래졌다.
-너도 결국엔 살인자잖아. 안 그래?
석민은 냉담한 얼굴로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시켰다. 민규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괜찮냐?”
“…네로야.”
“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민규는 잠자코 그를 기다렸다.
“네로야.”
“아 왜.”
석민은 그 뒤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 * *
석민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였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사흘 뒤에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석민보다 석민의 어머니를 더 사랑했다. 그는 석민이 젖먹이일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구타했다. 때로는 아이가 혼절하기 직전까지 목을 조르기도 했다. 석민에게 폭력은 일상이었고 그것을 감내하는 것은 숙명이었다.
“네 엄마 대신 네가 죽었어야 돼.”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에 대한 석민의 대답은 매번 어쩌라고요, 였다. 찍소리도 못 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것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때리면 때릴수록 더 발악했고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호구처럼 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석민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즈음이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의 머리채를 끌었고 석민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계단을 잘못 디딘 것은 명백한 사고였다. 그는 쓰러지면서 계단 모서리에 몇번이고 머리를 부딪혔다. 두개골이 으스러지고 다리뼈가 뒤틀렸다. 석민이 계단 아래로 급히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어냈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석민은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15분 후 과다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사망 원인은 사고사로 기록되었지만 석민은 이때부터 자신을 살인자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석민은 어렸고 방세는 비쌌다. 밤낮 없이 일하고 학교 대신 편의점으로 출석 도장을 찍어도 하루 벌어 하루 쓰는 꼴이었다. 공중화장실만도 못한 지저분한 원룸에 살면서 석민은 늘 일에 치이고 외로움에 치였다. 이러다가는 수면 부족으로 죽거나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고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은 하나였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석민은 범죄조직에 처음으로 발을 담궜다.
처음 3년은 마약을 운반하고 그 다음 5년은 청부업을 했다. 비밀 루트를 통해 조달받은 글록은 그의 허리춤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방아쇠를 몇번 당기는 것만으로도 수천만원이 굴러들어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마음 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석민이 조직을 나오기로 결심한 것은 비가 요란히도 내리던 새벽이었다. 그는 약속된 시간에 특정 인물을 사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늦여름의 장맛비가 코트깃을 적셨고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담뱃불도 제대로 붙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담뱃대는 하수구에 버렸다. 저 멀리서 이른 동이 트고 있었다. 석민은 장거리 사격을 위해 근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라이플을 펼쳤다.
경찰복을 입은 민규가 옥상으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민규는 석민과 라이플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석민은 바보처럼 눈만 껌벅거렸다.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좆됐다.
아닌 밤중에 추격전이 벌어졌다. 석민은 조립하던 라이플을 내팽겨치고 옥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이동하는 동안 민규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간발의 차이로 석민이 먼저 아래에 도착하고 어지러운 골목길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의 뒷모습을 포착한 민규가 그를 따라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민규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고 석민에게는 집과도 같은 편안한 곳이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민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석민은 길을 잃은 민규가 당황한 틈을 타 그의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여어, 형씨. 미안한데 지금 좀 바쁘거든. 상관 없는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제발 얌전하게 굴어.”
민규는 대답 대신 석민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석민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자 민규가 그의 몸을 거세게 짓눌렀다.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 폭우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석민의 무릎이 민규의 복부를 가격함과 동시에 민규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팔뼈 부러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때를 놓치지 않은 민규가 석민의 몸 위에 올라타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석민이 항복의 표시로 부러지지 않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 방심했네.”
“…”
“너 몸 되게 좋네. 우리 조직에 들어올 생각 없어?”
“그게 경찰한테 할 소리냐?”
“왜. 조직일도 나름 수입 짭짤해.”
석민이 생글생글 웃었다. 민규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 찼다.
“양심 죽이면서 살 바에는 차라리 굶어 죽는게 낫겠다.”
“정말로?”
그렇게 묻는 석민의 목소리에서 위화감이 풍겼다. 민규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석민을 빤히 내려다봤다.
“돈 잘 벌 수 있는 직업 소개시켜줄게.”
“…”
“나 아는 사람 중에 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몇 있어.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니까 아마 너도 받아줄 거야. 잘하면 마술 교육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뭔 소리야?”
“조건은 네가 몸 담고 있는 그 조직에서 나오는 것.”
석민이 별 이상한 걸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기껏 범죄자를 잡아놓고 풀어주겠다는 건가? 일자리까지 제공해주고?
“…나야 잃을 건 없지. 그런데 경찰이 마음대로 그래도 돼?”
“괜찮아. 난 원래 제멋대로거든. 그리고…”
“…”
“오빠는 잘생겼으니까. 봐주지 뭐.”
예상 외의 답변에 석민이 숨 넘어갈 듯이 웃었다. 좋아. 석민이 민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직을 나가려는 사람은 모두 목숨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석민은 민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석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숨만 붙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했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그를 이 지옥 같은 삶에서 해방시켜 줄 수만 있다면 그깟 목숨 정도야 흔쾌히 버릴 수 있었다.
* * *
“뭐 먹고 싶어? 오랜만에 스테이크나 썰까?"
“나야 네가 사준다면 뭐든 땡큐지.”
석민이 민규의 안전 벨트를 매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저번에 원우 형이 좋은 레스토랑 추천해 줬었는데 거기 가자.”
밤늦은 시간이라 거리는 제법 한산했다. 석민이 운전하는 차가 도로를 막힘없이 달렸다. 대기실에서의 통화 내용도 잊을만큼 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을 밝혔다.
“달 예쁘네.”
민규의 중얼거림에 석민이 피식 웃었다.
“뭐야 고백이야?”
“어?”
“나쓰미 소세키가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로 번역했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민규가 창밖을 바라보며 그런 거 아니거든,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석민은 그의 반응을 즐기며 운전대를 옆으로 꺾었다.
“이석민.”
민규의 부름에 석민이 고개를 돌렸다. 민규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된 채였다.
“너도 눈치챘지.”
“아아. 응. 조금 전에.”
“어쩐지 운전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더라.”
민규는 뒤에 따라붙은 검은색 차량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일반인이라고 보기에는 집요할 정도로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석민이 오른손으로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오랫동안 잡아보지 않았던 글록이 그 형체를 드러냈다.
“이야. 지금 경찰 앞에서 총 꺼낸 거야? 총기 사용 불법인데.”
“잘생겼으니까 봐주라.”
석민이 눈을 찡긋거렸다. 민규가 웃음을 터뜨리며 자켓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권총을 꺼내들었다. 석민이 잠금장치를 해제한 것이 신호탄이 되어 민규가 차문을 활짝 열었다. 그가 쏜 탄환이 그대로 날아가 앞 타이어에 박혔다. 두번째는 빗나가고 세번째는 창문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방탄인가 보네.”
민규가 남은 총알을 모두 난사했다. 타이어에 명중한 모양인지 결국 검은색 차량이 뒤집어져 전복했다. 석민의 차가 코너를 돌자 대기하고 있던 또다른 다섯 대의 차가 어둠을 뚫고 뒤따라왔다.
“전(前) 조직원 하나 잡으려고 도대체 몇이나 출동한 거야.”
석민이 창문 틈새로 열심히 저격하며 짜증을 부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꽤나 끈질기게 따라올 것 같았다. 어쩌면 저 다섯 대가 전부가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80%를 웃돌았다. 석민은 민규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민규는 사격에 열중해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 했다. 석민은 내비게이션을 끄고 무작정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을 만한 곳으로 유인해야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석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총탄이 먼저 떨어진 쪽은 당연히 민규와 석민이었다. 둘 다 총이라고는 한 자루씩이 전부였고 비상용 총탄 따위 갖고 다닐 리 만무했다. 석민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려 최선을 다해봤지만 이미 뒷타이어는 바람이 빠지고 있었다.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해봤는데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대.”
민규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동차 타이어가 수명을 다한 곳은 이름 모를 바다와 낮은 보호벽이 앞을 막고 있는 고속도로 한복판이었다. 허공을 멍하니 노려보던 석민이 안전 벨트를 풀었다. 민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따라 풀려 하자 석민이 그를 막았다.
“넌 내리지 마.”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민규의 뇌리를 스쳤다. 석민은 차 문을 닫고 고속도로 보호벽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보호벽은 석민의 허리에 겨우 닿는 높이였다. 석민과 민규를 추격하던 검은 차량들이 잇따라 들어와 민규가 타고 있는 차 바로 뒤에서 멈췄다. 석민은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반기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민규가 석민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석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민규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석민은 민규의 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넌 이제부터 네로야.’
‘네로?’
‘검은 고양이 네로. 피부가 까맣잖아.’
왜 예전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사실 네로라고 부르는 이유는 피부색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 마주했던 그의 눈이 마치 고양이 같아서. 조직에서 나오라며 자신을 회유하던 그 눈빛이 예뻐서. 그래서 네로였다.
“네로야.”
“…응.”
“5초만 눈 감아 봐.”
“왜?”
석민의 의도를 눈치챈 듯 민규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석민은 그의 눈물을 못 본 척 눈을 피했다.
“마술이야. 사라지는 마술.”
“싫어.”
민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래서 차 안에 있으라고 한 거구나. 내가 너를 막으러 달려가는 것보다 네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더럽게 약은 새끼.
“네로야.”
“싫어.”
“…”
“절대 싫어.”
검은 차에서 석민의 옛 동료들이 내렸다. 석민은 보호벽 난간에 기대앉아 민규를 불렀다.
“난 다시 돌아올 거야.”
“거짓말.”
“진짜야. 알잖아? 마술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거야. 그냥 사라지는 거에 그치면 그건 실패한 마술이지. 그리고 난 단 한번도 마술에 실패한 적이 없고.”
민규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석민은 역시 약은 놈이었다.
“민규야.”
그렇게 따뜻하게 민규야, 라고 불러버리면
“…알았어.”
민규가 밀어낼 수 없음을 석민은 알고 있었다.
두 눈을 감자 지독한 어둠이 시야를 지배했다. 매 초가 억겁의 시간처럼 흘러갔다. 민규의 기억 저편에 자리잡고 있던 수많은 파편들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하나.
‘그래서, 형씨 이름이 뭐야?’
‘김민규.’
‘잘 어울리네.’
둘.
‘넌 뭔데?’
‘이석민.’
‘안 어울린다.’
‘아 너무하네. 난 좋게 말해줬는데.’
셋.
‘네로야.’
‘김민규라는 멀쩡한 이름을 냅두고 왜 만날 네로라고 불러.’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뭔 소리야.’
‘이름을 부르면 진짜로 좋아하게 돼버릴까봐.’
넷.
‘선과 악의 기준은 뭘까. 정해진 법률에 따르면 선이고 어기면 악일까? 하지만 그 법률이 악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난 그런 거 몰라.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 선이라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건 너일 거야.’
다섯.
‘민규야. 좋아해.’
5초가 지났다. 아니, 어쩌면 몇분일지도 모른다. 3초밖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고 끝을 맺어서 정확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민규는 눈을 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달빛이 어둠을 비집고 들어왔다. 허탈한 웃음 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석민은 더이상 눈앞에 없었다.
* * *
그 뒤로 경찰을 동원해서 절벽 근처를 수색해 봤지만 석민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상부는 시체가 파도에 떠밀려 갔을 거라고 단정지은 듯 했다. 세간은 각광받던 천재 마술사 도겸의 실종으로 잠시 떠들썩했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목을 파고들었다. 민규는 옷깃을 더욱 여미며 몸을 움츠렸다. 코가 빨갛게 얼어붙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아 부승관 또 엄청 칭얼대겠네.”
얼마 전 실연당했다는 후배 놈에게 밥이나 한 끼 사주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웃기는 일이었다. 자기도 얼마 전에 실연당한 주제에 누가 누굴 위로해. 민규는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려 목도리를 콧등까지 올렸다. 그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민규는 목도리를 아래로 떨구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장미 향기였다.
민규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운 누군가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마술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거야.
석민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민규는 점점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또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민규의 목소리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수천, 수만 번을 지우려 노력해봐도 지울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이름을.
“이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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